생각은 의무다.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생각은 또한 의지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생각이 자연스럽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의무이자 의지라니. 당혹스럽겠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기득권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저건 아니지”라는 생각을 표현했다가는 엄청난 불이익이 생길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는 생각을 쉽게 포기하는 쪽을 선택한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권력자의 생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편이 일신의 안전에 훨씬 유리하다는 무의식적인 판단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짐승이 된다. 자신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야만 하는 인간일 수 있다는 말..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잠시 혼절해서라도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잊으려고 할 정도로 고통은 참혹하기만 하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위로가 쇄도할 것이다. “그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인생이란 어차피 이별 아닌가요. 이별이 조금 일찍 왔을 뿐이에요” 등등. 그렇지만 고통이 완화되기는커녕 그들의 위로가 위선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니 겉으로 고맙다는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당신처럼 행복한 사람이 나의 고통을 헤아릴 수나 있을 것 같나요”라고 절규하기 십상이다. 이럴 때 자신보다 더 큰 상처와 고통을 가진 친지가 찾아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저 묵묵히 눈물을 비치며 우리의 손을 꼭 잡을 뿐이다. 이런 고통에 무슨 ..
생로병사(生老病死)! 불교에서 인생은 이 네 글자로 간단히 요약된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난다. 물론 우리의 삶이 이 네 가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불행하고 궁핍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우리 삶이 살아낼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생로병사 사이에 벌어지는 다채로운 일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도 하고, 여행도 떠나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음악도 듣고, 스포츠도 즐기고, 직장에서 일을 하고, 책도 본다. 그럼에도 불교에서는 왜 생로병사로 삶을 요약한 것일까. 그것은 생로병사가 우리 삶의 행복을 위태롭게 만드는 하나의 한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와 같은 것이다...
강신주 | 철학자 아이가 게임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은 있을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가 먼저 숙고해야 할 것이 있다. 왜 아이는 그렇게도 게임에 몰두하는가? 글자 그대로 게임은 놀이이기 때문이다. 호이징하(Huizinga)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간이 얼마나 놀이에 매료되는지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놀이의 어떤 특성이 인간을 그렇게 사로잡는 것일까. 노동과 대조했을 때 놀이는 자신의 특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철학적으로 노동은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불일치한 것으로, 놀이는 반대로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음주는 놀이일 수 있지만, 직장 상사와의 회식자리나 아니면 거래처 사람과의 회식자리에서..
강신주 | 철학자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그리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 개인으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봉건사회의 구조적 압력에 거의 압사 직전에 이른 홍길동의 절규다. 이런 절규를 통해 홍길동은 간접적이나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고, 형을 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 우리는 허균이 살았던 조선시대보다 더 나은 사회에 살고 있는가. 자주 이런 의구심이 드는 것은 입각을 꿈꾸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5·16 군사쿠데타를 쿠데타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슬픈 것은 5·16에 대해 “답변 드리기 어려운 점을 양해해달라”는 장관 후보자들의 솔직한 주문이다. 그들은 모두 5·16이 쿠데타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
강신주 | 철학자 마침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안티고네(Antigone)가 실정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한 것이다.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된 그녀의 오빠 폴리니케스(Polynices)의 시신을 매장했던 것이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테베의 왕이자 그녀의 숙부였던 크레온(Creon)이 정한 법, 그러니까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들판에 방치하고 그 누구도 장례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법령을 보란 듯이 어긴 것이다. 법령을 어겼지만 안티고네는 자신이 소임을 다했다고 느낀다. 심지어 분노한 크레온 앞에서 안티고네는 당당하기까지 했다. “제우스가 내리신 명령은 아니잖아요. 땅의 모든 신들을 다스리는 최고로 정의로운 분이 인간에게 그런 잔인한 명령을 내리신 적은 없으니까요. 저는 사람에게 신성한 법을 어기도록 할 만큼 숙부의 ..
강신주 | 철학자 깜짝 놀랐다. 학생인권조례 이후 교권이 위축되었다니. 선생님을 대상으로 했던 어느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선생님 한 분이 내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선생님! 학생이든 여성이든 아니면 인간이든 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사회적 약자라서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학생인권 때문에 교권이 침해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보다 약자는 아니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교권이라고 말하시려면, 교장 선생님이나 장학사, 혹은 교육 관료와 같은 상급 교육 기관의 관료주의나 권위주의에 대해 선생님들의 권리를 지키시려고 할 때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노동자에 대해 재벌의 권리를 말할 수 없고, 이등병에 대해 사단장의 권리를 말..
강신주 | 철학자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이만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반성하도록 만드는 예리한 글을 본 적이 있는가. 들뢰즈도 촘스키도, 그렇다고 해서 아감벤이 쓴 것도 아니다. 방금 읽은 글은 1961년 2월5일 우리 소설가 최인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