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덕! 보통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다. 2009년 9월18일 지리산의 주봉 천왕봉에는 낯선 풍경이 연출되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91세의 이병덕 할아버지를 포함한 다섯 명으로 구성된 노인 등정대가 천왕봉 정상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복 차림에 나무 지팡이를 짚고 정상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신선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죽기 전에 지리산 천왕봉 한번 가보자!” 젊은이들마저 헉헉거리게 만드는 천왕봉 등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노인 등정대는 아홉 시간의 사투 끝에 정상에 섰던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천왕봉에 등정하려는 우리 할아버지들의 의지에는 ‘스스로의 걸음으로’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 할아버지들은 스스로의 걸음..
무엇인가를 잘 아는 것과 무엇인가를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쉽게 확인되는 일 아닌가. 노골적으로 물어볼까. 지금 당신의 배우자에 대해 아는 것을 연애 시절에도 알았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결혼했겠는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법이다. 사람에 대해서만 그럴까. 아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는 누구보다 게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산이나 등산 장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포괄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카프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카프카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시시콜콜한 삶에도 정통하게 될 것이다. 아마 그는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도 몇..
지금 우리는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이미지는 체제가 우리를 훈육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모든 훈육이 그렇지만 훈육을 통해 체제가 의도하는 것은 자발적 복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자발적 복종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채찍이나 당근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체제는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배웠던 것이다. 어떤 노예도 당근이 없거나 채찍이 너무 가혹하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당근이 없어도 채찍이 가혹해도 도망갈 줄을 모른다. 오히려 당근과 채찍이 있는 곳으로 기꺼이 기어들어가려 한다. 직장에서 해고될 때, 우리는 다른 직장을 찾아 노동자의 삶을 영위하려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더 이상 감시할 필요가 없다...
아주 오랜 옛날 똘똘이라는 남자가 공룡을 한 마리 잡았다. 공룡을 잡아 마을로 돌아온 뒤, 그는 고기를 조금 잘라서 가족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미소가 절로 떠오르는 정말 훈훈한 풍경이다. 까마득한 원시시대에는 모두 마음이 너그러워 그랬던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경제체제로 정착되기 전, 그러니까 100여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 어느 마을에 잔치가 벌어졌다. 산불로 마을에 뛰어내려온 멧돼지 한 마리를 용감한 돌쇠가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거대한 멧돼지여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돌쇠는 기꺼이 멧돼지를 골고루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원시시대의 똘똘이와 ..
지난주 목요일 땅끝마을 해남의 아름다운 사찰 미황사에 다녀왔다. 조계종에서 기획한 출가학교가 열렸기 때문이다. 41명의 20대 남녀가 8박9일 동안 출가학교에 모여들었고, 나도 강사로 초청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번뇌와 상처가 그리 심해서 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여기에 모여 있을까.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 공양을 마친 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비를 피한 처마 밑에서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달마산이 보였다. 아까 강의를 들었던 몇몇 임시 행자 아가씨들이 반갑게 내게 말을 붙여왔다. 어쩐 일로 출가학교에 들어왔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상처를 보여줄 때까지 절대로 보여 달라고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처마 밑에서 그녀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출가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스님들이 스마트폰과 돈을 거둬갔다는 ..
우리는 불쌍하다. 알량한 도로교통법으로 헌법에 보장된 집회결사의 자유를 막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위 법률이 헌법에서 보장된 민주주의 정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우리는 남루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통행을 가로막는다고 혹은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 시위대 앞에서 욕설을 퍼붓거나 경적을 울리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에게 힘을 모아달라는 시위를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토로할 공간 자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모든 사람에게 시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 시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쟁취하는 지름길인데 말이다. 우리 공동체의 존망과 관련된 너무나도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
원자력 발전이 휘청거리고 있다. 그렇지만 제대로 휘청거린다기보다는 묘하게 휘청거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거듭되는 크고 작은 원전 사고로 전력 수급이 당장 위태롭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자력 발전의 핵심 부품이 부실 검사로 채택되었다는 더 위험천만한 이야기도 오가고 있다. 어느 경우이든 원전이 잘 돌아야 전력 수급이 차질이 없을 것이고 나아가 핵심 부품을 제대로 검사했다면 원전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논의일 뿐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원전과 관련된 최근 쟁점들은 원전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휘청거리고 있다는 점에서 묘하다는 것이다. 제대로 휘청거린다면 이번 여러 일련의 사고로 원자력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2년 전 일이다. 매출액 기준으로 5위 안에 들어가는 거대 출판사에 강의를 하러 간 적이 있다. 출판사 직원들에게 인문학 특강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이다. 저자로서 어떻게 출판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강연하기에 앞서 이미 나와 책을 함께 만들었던 편집자가 출판사의 최근 동향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충격이었다. 마케팅을 담당하는 직원이 출판 기획회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당장 5000부 이상 나갈 책이 아니면 기획회의에서 말도 꺼내기 힘들다는 푸념을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니체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나타나도 출간 제안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주저 의 경우 3년이 되어도 판매량이 200권을 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당시 니체가 자신의 주저를 출간하지 않았다면, 에 담겨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