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에 공포된 9개조는 조선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 국가형태로서 군주국을 천명한 흠정헌법적 성격을 가진 성문헌법”이다. (http://www.ccourt.go.kr/ 헌법재판소 홈페이지 데이터베이스 가운데, 에서) 이 9개조를 제정반포하기까지 역사의 흐름은 숨이 가쁘게 흘러 지나갔다. 1895년 을미년, 일본 깡패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민비를 살해했다. 얄궂게도 이 해 4월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가 처형되었고, 11월 민비가 살해당했으며, 12월 30일 단발령이 내려져 온 조선이 들끓었다. 1896년 2월 11일에는 겁먹은 고종과 왕자들은 친러파 대신의 기획에 따라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나 숨는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고종과 왕자들은 1년 남짓 러시아공사관에 ..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체는 민주공화국이다. 여러 단서를 붙이지 않을 수 없겠지만, 1945년 8월 15일이라는 한 매듭을 지나서야 한민족은 비로소 자유(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민주주의들을 호흡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을 계기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밑절미로 한 법치, 민주적 절차에 의한 권력 선출 들을 실현할 엄두를 내게 되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유보할 사항이 많지만, 해방은 기나긴 봉건 왕조 시대를 보낸 뒤, 지난한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어가는 속에서, 세계 인민과 국제적인 반파시즘 투쟁을 함께한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사진]_해방절 서대문형문소 앞. 구글 이미지에서 따왔음. 성균관대 사학과 정현백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 중등 역사 교과서는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이 수많은 선언을 낳았고..
彼若亦有一部靈悟. 豈不自羞. 若無靈覺. 驕蔑何益. 吾輩臭皮帒中. 裹得幾箇字. 不過稍多於人耳. 彼蟬噪於樹. 蚓鳴於竅. 亦安知非誦詩讀書之聲耶. _연암 박지원, 원문 전문 “영대정잉묵”을 빌려 블로그에 다섯 차례 글을 올렸다. 오늘 “영대정잉묵”에 “6”을 더하고 다른 꼭지로 넘어가려 한다. 그리 생각하니 이 한 편의 척독 은 깊이 읽고, 읽은 흔적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초책이 누군지는 모르겠다). 그 생각을 그대로 벋어, 짧으나 울림이 깊은 연암의 척독 한 편을 아주 천천히 한 줄 한 줄 읽어보도록 하겠다. 1. 足下無以靈覺機悟. 驕人而蔑物. >그대는 신령한 지각과 기민한 깨달음이 있다 하여 남에게 잘난 체하거나 다른 생물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족하足下: 대등한 상대에 대한 경칭이다. “그대”쯤 ..
보내 주신 문편(文編, 책으로 엮은 글)을 양치질하고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읽고 나서 말하오. 그대의 문장이 참 기발하오. 그러나 사물의 명칭에 차용이 많고, 인용이 딱 들어맞지 못하니 있으니 이 점이 옥에 티인가 하오. 그러니 노형을 위해 한마디 드리는 바요. 寄示文編. 漱口洗手. 莊讀以跪曰. 文章儘奇矣. 然名物多借. 引據未襯. 是爲圭瑕. 請爲老兄復之也. _연암 박지원, 에서 견줄 데 없이 정중하게 시작한 글이 어느새 바로 삼엄한 비평으로 접어들었다. 이 글은 연암이 당대의 문사로 유명했던 유한준(兪漢雋, 1732~1811, “창애蒼厓”는 호)에게 보낸 척독, 의 첫 문단이다. 에는 연암이 유한준에게 보낸 척독이 모두 아홉 편이나 실려 있다. 그 가운데는 이미 본 처럼 신선한 발상과 참신한 표..
은 새길 만한 경구의 밭이며, 기발한 수사의 밭이다. 연암은 때로 어린아이의 말이나 속담 따위를 활용해 이만한 경구와 수사를 만들어낸다. 또는 연암 특유의 문단 구성을 통해 장면이 극대화된 연극적인 경구와 수사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어린애들이 이런 노래를 부릅디다.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느니 바늘로 눈동자를 겨누는 게 낫다.” 또 이런 속담이 있지요. “정승을 사귀려 말고 네 몸가짐부터 신중히 하라.” 그대는 아무쪼록 명심하시오. 차라리 약한 듯 보여도 굳센 편이 낫지 용감한 체할 뿐 뒤가 물러서는 아니 되오. 더구나 남의 힘[권세]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孺子謠曰. 揮斧擊空. 不如持鍼擬瞳. 且里諺有之. 无交三公. 淑愼爾躬. 足下其志之. 寧爲弱固. 不可勇脆. 而况外勢..
이번에 살펴볼 글은 연암이 경지에게 답한 세 번째 척독이다. 에 남아 전하는, 연암이 경지에게 보낸 척독은 이 글까지 해서 세 편이 전부다. 먼저 그 전문을 보자. 그대가 태사공太史公의 를 읽었다지만 그 글만을 읽었을 뿐, 그 마음은 미처 읽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를 읽고서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나 생각하고, 을 읽고서 고점리高漸離가 축(筑, 고대 현악기의 하나)을 켜던 장면이나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런 쯤은 늙은 서생들이 늘 해 대는 케케묵은 이야기입니다. 또한 “부엌에서 숟가락 얻었다”는 소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어린아이들이 나비 잡는 모습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내민 다리는 반쯤 꿇고, 뒤로 뺀 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 두 손가락을 집게 ..
에는 연암이 경지에게 보낸 척독이 모두 세 편 남아 전한다. 의 편차상 경지에게 답한 첫 편지는 바로 앞 글 " 속으로_1"에서 본 바와 같다. 다시, 바로 앞 글 말한 것처럼, “척독은 한마디로 “짧은 편지”이다.” 짧은 글로서, “전화기 없던 시대의 전화 통화였고, 인터넷망 없던 시대의 인스턴트 메신저 또는 트위터 또는 페이스북”이었다. 연안은 에 부친 “자서”에서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온 글의 진솔함 및 주고받는 형식만이 담을 수 있는 표현상의 개성 들을 들어 척독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먼저 연암 자신이 척독마저 문학적 갈래로 소화한 ““척독가尺牘家”였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연암은 의 “자서”에서 척독을 “봄날 숲속의 새소리, 난바다 신기루 속 보물, 연잎 위의 이..
의 한 꼭지인 은 연암과 연암 지인 사이의 척독尺牘을 모은 꼭지이다. 척독은 한마디로 “짧은 편지”이다. 짧게, 사실이나 정보나 감상이나 일상의 한순간 따위를 압축했기에 편지틀을 갖추느라 장황해진 격식 있는 서간문과는 또 다르다. 척독은 전화기 없던 시대의 전화 통화였고, 인터넷망 없던 시대의 인스턴트 메신저 또는 트위터 또는 페이스북이었다. 면무식한 사람들은 척독으로 안부를 묻고, 끽다나 음주나 회식을 위한 약속을 잡았다. 척독은 주고받는 이쪽저쪽 당사자가 공유하는 비망록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편 일상의 한순간이나 마음속의 한 조각이 압축될 때에, 척독은 필경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소용과 구실을 감당했다. 옛 기록에 흔히 보이는 “동복童僕” 또는 “동복僮僕”이라 하는 어린 사내종은 척독을 주고받는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