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외교 사절의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청제국을 여행한 연암이 그 여행기 를 남긴 경위는 앞서 본 대로다. http://theturnofthescrew.khan.kr/64 참조. 이 여행에서 연암은 현대의 산책자-관찰자의 면모를 여실히 발휘했다. 연암의 눈은 열하의 계엄 상황, 몽골 및 티베트 대 청제국 사이의 긴장, 건륭제와 판첸라마의 회동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 또는 사태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염집, 술집, 전당포, 외양간, 거름 더미, 수레, 복식, 시장, 길바닥 인심 등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에 가 닿았다. 그는 현대의 도시 산책자 발터 벤야민처럼 청제국을 누볐고, 기록광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폴 스미스처럼 끝없이 비망록을 챙겼다. 이런 관찰과 기록을 근거로 해서 연암은 청..
1780년(정조 4년), 조선 조정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맞아 축하 사절단을 꾸린다. 그리고 이 사절단의 정사(正使, 사절단장)에 영조의 사위이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의 팔촌형인 박명원을 임명된다. 연암은 이때, 일생을 걸쳐 어쩌면 딱 한 번 집안 인연을 활용했는지 모른다. 연암은 직제에도 없는 비공식 시종 병졸 자격으로 팔촌형님이 사절단장으로 있는 사절단에 껴든다. 당시 연암의 나이가 마흔넷. 생각과 글쓰기 모두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중년에, 세계 문명의 중심지이자 북학론北學論의 현장인 청제국에 육박할 기회를 맞은 것이다. 연암은 18세 무렵을 지나면서는 썩은 세상에 대한 실망과 과거 급제만을 위한 글공부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었다. 실망과 회의는 두통과 우울로 나타났고,..
마음껏 소리 지르기, 아픈지 안 아픈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박수 치기, 마음속 조마조마를 응축할 대로 응축했다가 하단전의 숨을 한순간에 휘발시키는 득의의 또는 아쉬움의 감탄사 내뱉기... 지독히 역동적이며 도회적이며 그동안 없었던 이 휴식 방법은 격투 이상으로 사람의 야성을 건드릴 수도 있다. 드라마 이상으로 사람을 빨아들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래 링크를 따라가면 나오는 시에서 보듯, 의 시인 심훈의 가슴은 야구 앞에서 이렇게 일렁이기도 했다. http://theturnofthescrew.khan.kr/46 한민족에게, 하기와 보기 두 측면에서 너무나도 새로운 이 행위는, “문명개화”의 시대에 바다 건너에서 새로이 들어왔다. 베이스볼baseball. 각각 아홉 명이 두 패로 나눠 아홉 회 동안 공격과..
자전께서 사려 깊으시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하께서는 어리시며 그저 선왕께서 남긴 외로운 후사일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온갖 자연의 재앙을 감당할 것이며, 억만 갈래 인심을 수습하시겠습니까? (慈殿塞淵 不過深宮之一寡婦 殿下幼冲 只是先王之一孤嗣 天災之百千 人心之億萬 何以當之 何以收之耶) 위 인용문은 조식(曹植, 1501~1572)이 쓴 의 한 구절이다. 호 “남명南冥”으로도 유명한 조식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중기 영남의 학풍을 반분한 대학자다. 대학자이되 지리산 자락에 파묻혀 오로지 자기 공부와 후학 양성에 힘쓴 학자다. 이익 에서 조식을 평해 “우리나라에서 기개와 절조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는데, 기개와 절조 때문이었는지 조식은 결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
봄 이울 틈 없이 바로 여름이다. 늦봄 없이 여름이니 “이울다”는 말은 도무지 소용에 닿지 않는 시절이다. 이운 봄 없이 여름이 오고, 거리는 여름 화장으로 빛난다. 눈은 오늘의 거리에 두고, 손은 문득 조선 후기 시인 이옥(李鈺, 1760~1813)의 문집을 뒤진다. 歡莫當儂髻 그대, 내 트레머리에 닿지 말아요 衣沾冬栢油 옷에 동백기름 묻어나니까 歡莫近儂脣 그대, 내 입술에 가까이 오지 말아요 紅脂軟欲流 붉은 연지 부드러워 흘러드니까 이옥의 연작시 가운데서도 자신의 매력을 뽐내(유보할 사항이 있으나 아무튼 “팔아”) 먹고사는 여성들을 제재로 한 노래 모음인 에 속한 노래 한 자락이다. 보는 그대로다. 화장은 복식과 함께 하게 마련. 수고를 다해 트레머리를 올리고 동백기름으로 마무리한 여인. 연지..
“사람을 쥐에 비유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모욕죄 씌우는 것도 그렇고 참 인간이란 얼마나 자기들 멋대로인지...쥐들은 자기 삶에 충실할 뿐인데 인간이 자기들의 도덕적 잣대로 쥐를 평가하고, 나쁜 사람 닮았다고 쥐를 모욕한다.”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본 한마디다. 시절이 수상한 판에 이규보의 이며 을 소개했는지라 이 한마디도 심상히 보이지 않아 자꾸 들여다봤다. 들여다보며 뭐라 딱히 설명할 길이 없는, 웃자고 웃는 웃음이 아닌 웃음이 슬며시 흘러 나왔다. 사람도 쥐도 참 억울하고 힘든 시대구나... 이규보의 시대는 농업 생산이 생산의 거의 전부였던 때였다. 한데 사람은 그 귀한 농업 생산의 시작인 종자 보존에서부터 쥐와 싸워야 했다. 자연스런 산화-부패는 제쳐두고, 수확한 농업 생산물을 지키기 위한 ..
이규보는 앞서 소개한 시 에서 “대놓고 까부는 것도 완악한 노릇인데/심지어 지랄에 행패까지?/시끄럽게 다투며 내 잠을 방해하고/약삭빠르게도 사람이 먹을 것을 훔치는구나”라며 쥐를 꾸짖었다. 그리고 고양이가 있는데도 쥐가 이렇게 날뛰는 까닭은 “실은 고양이가 재주가 없어서”라고 했다. 이 새벽, 쥐를 소재로 해 쓴 이규보의 또 다른 작품을 뒤지다 문득 한 조각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오늘 이 나라에 쥐 소동이 횡행하는 까닭이, 실은 이 나라 국민이 못나서일까? 모를레라! 애오라지 13세기 사람의 글에 눈을 둘 뿐이다. 입술에 쥐 기름을 칠하고, 뱃속에 쥐 살점을 장사지낼 고양이는 어디 있는가. 에서 이규보는 아직 고양이를 풀어내지는 않았다. 다만 저주의 수사를 풀어낼 따름이다. 아래와 같이. 우리 집에서는 ..
眼如劈豆角 눈은 콩을 쪼개 놓은 듯 伺暗狂蹂蹈 어두운 데서 엿보다 미친 듯 짓밟는다 任爾穿我墉 멋대로 우리 집 담을 뚫을 때 滔滔皆大盜 거침없는 기세가 어느 모로 보나 대도大盜의 그것 위 시는 이규보의 가운데 부분이다. 은 모두 여덟 수 한 편으로 이뤄진 연작시로 각각 두꺼비/개구리/쥐/달팽이/개미/거미/파리/누에 들을 형상화했다. 앞서 이규보의 작품은 13세기 고려 사회사, 문화사의 거의 모든 열쇠말을 포괄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동식물에 걸친 생물종 또한 그의 작품에 두루 나타난다. 그 가운데 “쥐”는 인민의 생산, 사람의 생활을 해치는 생물로 등장하곤 한다. 물론 이규보는 쥐 또한 생존을 위해 인간 생활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아래 작품은 그 좋은 예다. 人盜天生物 사람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