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이규보의 삶을 건성으로 훑고 나니, 몇천 편이나 되는 그의 글이 눈에 밟혀 못쓰겠다. http://theturnofthescrew.khan.kr/50 http://theturnofthescrew.khan.kr/51 http://theturnofthescrew.khan.kr/52 http://theturnofthescrew.khan.kr/53 http://theturnofthescrew.khan.kr/54 그를 “시인”이라, “문신관료”라 일러 놓고는 에 어찌어찌 할애하다 그만이었으니 못쓰겠다. 하여 5월 한 달은 깜냥 되는 만큼 이규보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 순서다. 사람들은 흔히 시를 고상한 갈래로 여긴다. 시에 쓰는 말은 고상해야 한다는 편견도 있다. 이 통념, 이 편견은 중세..
불우한 이십대를 난필과 난독과 침잠으로 가로지르며, 이규보는 제대로 된 벼슬에 더욱 욕심을 내게 된 듯하다. 에서 보인 것 같은 빛나는 재주가 있다고 한들, 다만 임용 대기자의 재주라면 과연 그 재주가 꽃필 수 있겠는가. 이규보는 22세에 과거에 합격한 뒤, 25세에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자전自傳을 썼다. 연보는 이 글쓰기를 일러 “스스로 자신의 행동거지를 서술했다(自敍己之行止)”고 했다. 여기서 행동거지란 “일상과 삶 속 자신의 몸가짐 전체”로 새기면 되겠다. 이규보는 24세에 아버지 상을 당한 뒤 천마산에 우거하며 난독과 난필의 세월을 보내다 드디어 지나온 자신의 생을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앞날의 생 또한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이윽고 26세에는 을 완성해 나라와 시대를 향한 포부를 웅대..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에는 고구려 사람 스스로가 남긴 고구려 건국 이야기는 물론, 지금은 볼 길이 없는 와 같은 고대사의 흔적까지 살아 있다. “배움이 없는 남녀 백성들”이 “제법 그럴싸하게 주고받”는 신비롭고 기이한 이야기를 접한 데다 과 같은 국내외 역사서까지 섭렵한 이규보는 자연스레 신화․전설․민담․역사를 아우를 길을 찾게 되었을 것이다. 그 서문에서 보았듯 이규보는 이제 동명왕-주몽 이야기에 깃든 상상 및 상징 세계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게 되었고 그 재해석의 결과, 공식 역사 기록에 기댄 연대기가 아닌 문학-서사시를 선택하게 되었다. 시인다운 선택이었다. 그 시가 담은 것 은 5언시 282구에 산문으로 된 해설이 덧붙은 한문 서사시다. 주몽의 출생-시련-투쟁-승리는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
몇백 년 세월을 건너온 이야기 고구려 건국 시조 동명왕-주몽이 1)부여 계통으로[出自北夫餘], 2)하늘나라[天帝]와 물나라[河伯]를 아우른 혈통이며, 3)알을 깨고 이 세상에 나와[剖卵降世], 4)4)홀본(또는 졸본)에 도읍해 나라를 세웠다[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는 이야기는, 앞서 에서 본 대로 고구려인 자신이 그린 건국 시조의 영상이다. 그리고 그 영상은, 광개토왕릉비 건립 시점을 기준으로, 적어도 7, 8백 년을 건너 고려로 이어졌다. 이는 고려 때 편찬된 정사 에서, 를 깊이 의식한 에서 본 대로다. 는 정사 체제인 본기本紀에 위 1)~4)의 줄거리를 남겼다. 는 여기에 들에 실린 고구려 건국 기록까지 아울렀다. 한편 는 북부여-동부여-고구려 순서로 기록의 편차를 잡고 동명왕-주몽의 고구려 건..
동명왕의 17세손하늘나라[天帝]와 물나라[河伯]를 아우른 혈통으로, 알에서 이 세상에 나와[剖卵降世], 나라를 세우고, 황룡의 목덜미를 밟고 승천한 고구려 시조 추모왕, 곧 동명왕. 은 소략한 기록일망정 동명왕과 광개토왕을 이렇게 연결하고 있다. “유명을 이어받은 태자 유류왕은 도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정권을 이어나갔다. [추모왕]의 17세손에 이르러,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이라고 하였다. 그 은택은 하늘에 미치고 군사적 위력은 사해에 떨쳤으며 □□을 제거하니(2자 인멸. 판독 불가) 사람들은 저마다 생업에서 편안했으며 나라와 인민은 넉넉했고 오곡은 풍성했다. 하늘이 [우리 인민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돌아가시니 갑인년 9월 ..
새봄이 되면, 새봄에 활짝 핀 꽃을 보면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로 유명한 이규보(李圭報, 1168년∼1241년)가 바로 그 사람이다.이규보는 1168년 고려 의종 22년에 태어나, 스물두 살에 처음 사마시에 합격했고, 서른두 살 무렵 본격적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1236년 고려 고종 23년 조정에 사직을 애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237년 고려 고종 24년에야 사직할 수 있었다. 사직이 받아들여진 당시, 이규보의 관계官階는 종2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고 관직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에서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예부사判禮部事” “한림원사翰林院事”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는 여섯 가지를 겸하고 있었다. 여섯 벼슬 모두..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뒤 조선이 망하기 전까지, 조선이 일본에서 주로 들여온 상품은 면직물, 등유, 술이었다. 조선은 그 대가로 귀하디귀한 쌀과 콩을 일본에 내주었다. 면직물. 유럽의 대형 방직공장에서 생산된 값싼 면직물이 일본에 도착하면, 일본은 그것을 많은 이익을 남기고 조선에 되팔았다. 일본은 생산 없는 중개만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등유. 말그대로 “등燈” 밝히는 데 쓰는 “기름油”이다. 그때까지 조선 사람들은 피마자기름이나 쇠기름 따위로 등불을 켜 어둠을 밝혔다. 초도 있었지만 그때까지 초란 벌통 찌꺼기인 밀납으로 만든 밀납초뿐이었다. 이는 왕실이나 문벌 높은 양반님네나 쓰는 귀한 조명 재료일 뿐 서민대중은 ..
들로 유명한 작가 채만식(蔡萬植, 1902~1950). 채만식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 웃을 줄 알았구나. 웃을 줄 아니까 이만한 글을 썼구나.” 사진은 1923년 채만식이 와세대 대학교 축구부원으로 출전해 우승한 뒤 찍은 것입니다. 가슴에 붙은 “W”, 와세다 대학교의 표지와 곁에 놓인 우승 기념배가 스물한 살 젊은이와 썩 잘 어울립니다. 다음 사진은 20대에 찍은 듯한 사진입니다. 여기서도 환히 웃고 있죠. 그 다음 세 번째 사진은 1936년 서른네 살 때 찍은 사진입니다. 역시 웃고 있어요. 채만식은 1902년에 태어나 1950년 6월 10일에 돌아갔습니다. 동족상잔을 이승에서 목도하지 않았음은 다행이랄까... 살다가 간 세월이 참으로 어렵고 불행한 때에 걸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