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은 시나브로 어두워가지만 낮 동안 달궈진 ‘봄의 마을’ 광장의 시멘트는 여전히 후끈거립니다. 장마는 끝나고 더위는 말복을 향하여 밤에도 쉬지 않고 맹위를 떨칩니다. 바람 쐬러 나온 사람도 몇 보이지만 바람은 불지 않습니다. 8시. 몇 안 되는 음식점도 파장을 준비하고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밤새 불 밝힐 24시간 편의점들이 슬슬 존재를 드러냅니다. 한여름 저녁 8시는 해 지는 시간이자 곧 잠들기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인구 몇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소읍에서 촛불집회란 애당초 어울릴 일이 별로 없는 것이라 ‘국정원 규탄 민주주의 수호 서천군 촛불 문화제’는 불야성 서울 한복판의 그것과는 시공간, 즉 차원이 다른 무엇입니다. 서너 차례의 목요일 집회에 모인..
1980년대 대학가나 시위 현장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루어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그 노래를 신앙처럼 혼신을 다해 많이도 부른 것 같다. 대학시절에 활동했던 가톨릭학생회는 운동권이었고, 나는 인천의 야학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면서 시위와 집회에 쓸려다니고 있었다. 바람 같은 세월이었다. 열대어 수족관이 있는 다방에서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마치 독립운동가들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속닥거리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군에 입대했는데, ‘..
지난달 국립극장에서 조금은 특이한 국악 공연을 즐겼다. 전석 초대의 행사였지만 출연자의 면면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질 만한 공연이었다. 시내에서는 후덥지근했는데 남산 자락이라고 공기가 제법 삽상했다. 이번 공연은 탁월한 전통공연 기획자인 진옥섭 감독이 자신의 책 (문학동네)를 재출간하면서 마련한 무대였다. 노름마치란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명인을 뜻하는 남사당패 은어이다. 책에는 강호에 숨어 있던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발굴하기까지의 내력과 한껏 괄시받았던 그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흥과 멋이 두루 어울린 판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글뿐이랴. 입에 발통이라도 단 듯 말솜씨도 뛰어난 저자가 등장하자 분위기가 일순 후끈해졌다. “3분 이상 ..
봉선저수지를 배경으로 석양이 아름다운 서천군 벽오리 마을 입구에는 농산물 무인판매대가 있습니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검은 비닐봉지 등으로 정성껏 포장한 풋고추, 오이, 마늘, 양파, 계란 등을 매일 아침마다 진열하고 돌아섭니다. 누가 왔다 갔는지는 모르지만 물건과 돈은 대체로 일치하는 편이고 쪽지 메모들이 간혹 덤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작은 스티커에 주인이 써 놓은 손글씨가 가격입니다. 낮 동안은 새나 다람쥐만이 지나가다 가끔 쳐다볼 뿐입니다. 다만 돈 통만은 두꺼운 자물쇠로 꼭꼭 채워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신난 젊은 이장의 등쌀에 못 이겨 “팔리기야 하겠어. 재미로 좀 하다 말지”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재미로 좀 하다 보니’ 하루 매출이 평균 3만~4만원까지 늘게 되고 재수 좋은 주말에는..
지금 내가 일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정양모 신부의 란 책을 작년에 펴낸 적이 있다. 정 신부는 “팔리지도 않을 책을 내줘 고맙다”는 말씀을 거듭하셨다. 정 신부는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예루살렘 도미니코회 성서연구소에서 연구했으며, 광주 가톨릭대와 서강대, 성공회대에서 교수를 역임한 굵직한 성서학자였지만, 급진적 견해 때문에 한국 교회 안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아마도 결정적인 단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을 너무도 사랑하고 사모한 나머지 고대인의 어법으로 최고의 존칭을 붙여드린 것”이라는 발언 때문일 것이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와 성령을 모두 하느님으로 여기는 가톨릭교리와 어긋나기 때문에, 어느 성당에서는 그분의..
수도권 끝자락에 자리한 집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 도심으로 볼일을 보러 나갈 때면 ‘서울 백병원·평화방송’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횡단보도를 건너 50m쯤 걸어가야 하는데, 그 짧은 길을 지날 때마다 나는 홀연히 감개무량하여 남들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벌쭉벌쭉 웃기도 하고 몽상에 잠기기도 한다. 사람들이 예사롭게 스쳐지나가는 ‘마른내길’ 인근이 바로 조선시대 ‘건천동(乾川洞)’이라 불린 유서 깊은 동네다. 강릉에서 올라와 불행한 결혼을 하기 전까지 난설헌 허초희가 높고 아름다운 시흥을 돋우었던 본가가 여기 있었다. 걸출한 학자였으나 입신출세에 뜻이 없어 사직을 거듭했던 퇴계 이황이 임금이 부르면 마지못해 상경해 머물던 가택도 이 주변에 있었다. 생전에 불운한 무장이었으나 사후에 한..
궁리출판의 목록에는 웰다잉 시리즈가 있다. 목숨을 받은 이상 누구도 피해갈 수는 없는 마당에 죽음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기획한 책들이다. 등 열 권을 훌쩍 웃돈다. 이런 사정을 헤아렸는지 영화사에서 가끔 제의가 들어온다. 죽음을 다루는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티켓과 책을 교차 부조해서 마케팅을 하자는 것이다. 는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일본 영화였다. 주인공은 가짜 죽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스크린에서 전개되는 죽음은 육체의 진짜 스러짐이었다. 회사에서 은퇴한 주인공은 제2의 인생을 설계할 꿈에 부푼다. 그러다 덜컥 위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그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원치 않아 얻었기에 농담 삼아 인생의 혹처럼 여긴다는 셋째딸은 영화감독이다. 그는 죽음 준비를 꼼꼼히 하고 ‘혹’은 아빠의 투병..
어느덧 들판은 푸르게 채워지고 이른 봄에 심은 작물들은 청년이 다 되어 갑니다. 파종해서 모내기까지는 난리 굿판이었습니다. 모를 시집보낸다는 나긋한 말도 있지만 오죽하면 ‘모싸움’이라고 하겠습니까. “모싸움 끝났는가?” “욕봤네.” 보는 사람마다, 볼 때마다 들에서 나누는 인사는 우리의 동업자 정신입니다. 우리끼리만 했던 일은 아닙니다. 도시에 사는 친지들이나 일 좀 써먹을 만한 친구들은 기특하게도 휴가까지 내고 와서 일을 거들거나 아니면 전화를 잘 받지 않았습니다. 일을 거들었거나 전화를 잘 받지 않았거나 봄이 지나가는 동안은 모두 애썼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공부하느라 바쁜 학기 중에도 사나흘 내려와 함께 일했던 ‘청년 농활대’들의 땀도 들판에 녹아 있는 것이라 어린 모는 더욱 짙푸른 나락이 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