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은화(銀花)로 뒤덮이고 며칠 지나 경북 안동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도산면 토계리 퇴계 종택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이육사 문학관에서 열린 낭독회에 초대받은 터였다. 문학관은 큰길에서도 한참을 골짜기로 파고들어 벽처나 다름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외진 곳까지 누가 시와 소설 낭독을 들으러 찾아와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행사가 열리는 강당이 꽉 차 있었다. 문학관이 주최하고 지역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벌이는 ‘이육사문학축전’이 10년째 거듭되다 보니 그만큼 ‘열성 팬’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한겨울 추운 밤의 마을방에 마을꾼들과 모여 앉은 듯, 마음이 낙낙해졌다. 함께 초대되어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안동까지 가는 길에 시인 손택수가 물었다. “누이는 한국시 중에 가장..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면 자연스럽게 지난 일 년 동안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보게 된다.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성취와 좌절, 희망과 절망… 더하고 빼어 보면 가까스로 ‘제로’이거나 어쩔 수 없는 ‘마이너스’이기 십상이다. 오직 흔들림 없는 ‘플러스’ 항목은 맛도 없이 꾸역꾸역 먹는 나이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말이 되면 허겁지겁 모임 자리를 만들어 적자의 슬픔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시끌벅적 확인코자 하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찰과상같이 쓰라린 쓸쓸함은 현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1616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숭하는 일에 명황제가 고명을 내린 것을 축하하며 실시한 증광시에서, 마흔두 살의 광해군은 사뭇 엉뚱한 책문(策問)을 내린다.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
작가라는 이름으로 문학의 자장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입이 싸거나 귀가 얇거나 둘 다이거나, 결핍에 민감하고 외로움에 취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모든 작가가 각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지극히 개별적이라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작가가 하나의 세계다. 모두 달라야 마땅하고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이다. 그러하기에 백만 부를 파는 한 명의 작가보다 만 부를 파는 백 명의 작가가 절실하다. 한 개의 세계보다는 백 개의 세계가 풍요롭고 보배롭기 때문이다. 세계는 확장되는 가운데 깊어진다. 2013년 2분기를 기준으로 하루에 스물세 권에 달하는 소설이 출판되었다. 이천백두 개의 세계가 은밀하고 도도하게 열렸다. 하지만 그중에서 독자들과 폭넓게 만나는 기회를 가진..
그날, 교문의 쇠창살을 부여잡고 자꾸 내 눈을 맞추려 애쓰던 엄마를 외면하고 돌아서 낯선 강의실에 몸을 부렸다. 그리고 12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 혹은 관성으로 묵묵히 시험을 보았다. 점심으로 싸간 햄버거는 오래오래 씹다가 아무것도 소화시킬 수 없을 듯한 체증에 그대로 뱉었다. 긴장만큼 비린 육즙과 불안처럼 흥건한 노린내가 마지막 시간까지 코끝과 입안에서 맴돌았다. 아무도 모르게 내내 헛구역을 했다. 날씨와 상관없이 모질게 추웠던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이론’에 따르면 무작위의 기억은 그것을 접한 19분 후에 41.8%, 63분 후에 55.8%, 31일째 78.9% 사라진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19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58.2%, 63분 후의 44.2%,..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다면’이라는 책 제목이 있지만, ‘지금 알고 있는 걸 (당연히) 그때도 알았던’ 일이 있다. 최소한의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의도된, 방기된, 무책임한 욕망이 무지를 가장했을 뿐이다. 멀쩡한 강바닥을 파헤쳐 ‘공구리’를 치고 얻을 게 무엇인가. 삽질 한 번에 밥 한 술이라도 얻어먹을 욕심이 아니라면 상하좌우, 남녀노소, 이 땅에서 나고 죽고 새끼 치고 살아갈 모든 숨붙이에게 백해무익한 헛짓이었다. 캄캄한 방구석에서 나라를 근심하는 노나라 아낙처럼, 나는 홀로 분개하여 “4대강 살리기인지 뭔지를 하려거든 차라리 바벨탑을 지어라!”는 괴악한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넉넉한 터를 잡아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으면 ‘그들’이 그토록 열..
미국의 코미디언 아니타 렌프로가 로시니의 오페라 을 익살스럽게 개사한 일명 ‘엄마송(William Tell Momisms)’은 가히 전 세계 엄마들의 ‘숙명’인 ‘잔소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일어나라, 세수하라, 숙제 챙겨라, 전문가들이 강조한 대로 아침은 꼭 먹어야지…. 일상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말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내 말을 듣고는 있니, 식탁에서 문자질 말고, 오늘 컴퓨터 시간은 끝났어, 물건 좀 제자리에 놓으렴…. 매일의 실랑이가 고스란히 재현된다. 압권은 엄마가 이럴 수밖에 없는 까닭을 해명, 아니 합리화하는 대목이다. 네 친구들이 죽으면 너도 따라 죽을 테냐, 한 번만 더 말하면 천 번도 훌쩍 넘겠다, 네가 나이가 들면 지금 내 말들을 고맙게 여기게 될 게다…. 그리하여 노래..
분류학적으로 볼 때 나는 제자리에 정주하는 식물이 아니고 대지와 분리된 동물계의 일원임이 분명하다. 숙명적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괴테)라고도 했지만 그건 차원이 다른 격언일 것이다. 발을 꼼지락거리고 눈알을 굴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스스로도 좀 채신머리없어 보였다.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그러는 것보다 그러지 않는 것이 훨씬 윗길인 줄이야 진작 알았지만 이 버릇을 좀체 제압하지 못했다. 서두가 제법 거창해졌으나 별다른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연필 한 자루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추억을 들추기 위해 가끔 두리번거려도 좋다는 것을 말하려고 다소 장황하게 말머리를 잡은 셈이다. 중국소설을 전공하는 분들의 모임인 중국학센터에서는 방..
장맛비가 잠시 수그러들고 먹구름이 옅게 흩어지던 어느 날 오후, 그는 교회 앞마당에 서서 잔잔한 남서풍에 실려오는 희미한 바다 비린내를 맡았다. 굵은 비가 쏟아진 직후의 바다 비린내는 거칠고 차갑다. 고기잡이배에서 막 내려서는 바닷사람의 냄새가 꼭 그렇다. 그의 교회가 있는 서천의 바닷가 마을에는 이제 그런 사람이 없다. 마을은 더 이상 바다에 기대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리 기댈 곳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교회처럼. 혹은 그처럼. 파란 샌드위치 패널로 벽을 두르고 붉은 함석지붕을 올린 교회당에는 앞좌석의 등받이가 뒷좌석의 책받침대로 이어지는 긴 나무의자가 열 개씩 두 줄로 놓여 있고 그 중앙에는 가슴 높이의 작은 설교대가 있고 왼쪽에는 낡은 피아노가 있다. 그 외의 장식이나 기물은 하나도 없는 단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