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나는 돛 없는 배였고, 태어나면서부터 잠수부처럼 이 항구에서 저 해안으로, 애달픈 가난에서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을 따라 떠돌아야 했다.” 15세기 피렌체의 공화주의자였던 단테는 교황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점령하자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을 쳤고, 추방된 단테는 객사했다. 단테는 에서 그 분노를 담았다. 당대의 두 교황을 지옥에 던져 넣었는데, 성 베드로가 이들을 향해 “너희는 내 무덤을 피와 더러움을 담는 그릇으로 삼았다”고 선언했다. 단테는 “어떻게 악한 사람이 잘사는 상황이 계속될까?” “만일 하느님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다면 왜 그 힘을 쓰지 않을까?” 질문하면서, 그가 만난 악한 정치가와 교황, 성직자들을 지옥에 처넣었다. 당대의 알렉산더 6세 교황은 전쟁을 부추겼으며, 부인이 다섯이나 되..
광수형이 결혼을 한단다. 이 글이 실린 신문의 헤드라인 뉴스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그날 다른 신문들의 제1면은 한 이성애자의 권력을 이용한 ‘음란하고 더러운’ 성추문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파트너와 다정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아름답고 성스러운’ 결혼을 발표하는 그는, 바로 동성애자 영화인 김조광수였다. 나와 남동생, 우리 남매에게는 시쳇말로 ‘어(색한 자)부심’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 두 명과 같은 집, 같은 방에서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은 군에 입대하기 직전 우리 자취방에서 자고 간 ‘한국 제1호 게이 연예인’ 홍석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여름방학 동안 우리 집에서 동생과 친구들을 ‘학습’시킨, 내년에 ‘한국 제1호 동성 결혼식’을 거행한다고 발표한 김조광수..
“1. 말하는 이가 대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아랫사람을 상대하여 자기를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 2. 남이 아닌 자기 자신. 자아. 3.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지속하여, 작용·반응·체험·사고·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 국어사전에서 찾아본 어느 낱말의 뜻풀이다. 항용 사전에서 모든 표제어들의 기술 내용은 서로 의존적이다. 모든 설명은 죄다 이런 식이다. 기역은 니은에 기대고 니은은 디귿에… 히읗은 다시 기역에 의지한다. 그러니 사전은 결국 뱅뱅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건 사전이 부실해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인간 언어의 한계가 그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저것이 아니고 그것과 ..
‘어르신에게 기초연금 월 20만원’과 ‘쌀 직불금 100만원 인상’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은 지난 대선에서 농촌지역의 많은 어르신들을 설레게 했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엷은 미소는 마을이 들썩들썩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를 자극했고 잘빠진 빨간색 디자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데, 더군다나 꼭 꼬집어 쌀 직불금 100만원이라니! 제아무리 홍보의 신이라고 해도 현수막 하나에 이런 기막힌 조화를 담아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쌀값 보전을 위해 농민들에게 지급되는 쌀 고정직불금을 현행 1㏊(1만㎡)당 7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인상해 주겠다는 공약의 예술적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년째 17만원으로 고정되어 있는 쌀 목표가격은 물가상승률과 생산비 인상 등을 반영하여 현실화하고, 고정직불금을 1㏊에 1..
추사 김정희의 글씨 가운데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라는 말이 있다. “작은 창으로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하네”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시던 어린 시절, 일찍 학교를 파해 집에 돌아와 컴컴한 빈방에 들어가 누워 있자면, 그 방의 유일한 쪽창에서 마치 영사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기둥처럼 햇빛이 밀려 들어왔다. 햇빛의 많고 적음은 창의 크기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그때 이미 알아차렸다. 요즘 가장 대표적인 주거시설인 아파트 베란다는 전면 통창이지만, 창이라 할 수 없어서 어둠을 비추는 빛을 느낄 수 없다. 어둠이 자욱해야 빛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 어렸을 적 한겨울에 아이들과 구슬치기를 할 때,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언 손을 바지춤에 넣곤 했다. 그 따뜻함..
5월에는 별칭이 많다. 꽃과 신록이 천지간에 난만하니 계절의 여왕이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줄줄이 이어지는 가정의 달이요,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도전과 응전이 맞부딪힌 항쟁의 달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깥세상과 상관없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5월은 엘리엇의 4월 못지않게 ‘잔인한 달’이다.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때 내 주변의 친구들은 잔뜩 화가 나 있었고 얼마간 풀죽어 있었다. 3월과 4월의 모의고사와 중간고사 성적에, 꿈과 현실의 간극에, ‘3당 4락’이니 ‘4당 5락’이니 하는 소리로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불편한 수면에, 강제 학습에 다름 아닌 자율 학습에, 독서실의 탁한 공기에, 매일 아침 시험일 디데이를 새로 고치는 주번에, 고3 수험생을 ..
내 이럴 줄 알았다. 겨울은 호락호락 쉽게 물러가는 법이 없다. 봄날의 훈풍이 당연한 4월 중순의 주말이었건만 뜻밖의 눈이 배달됐다. 어디 공중에서 오는 날씨만 그럴까. 우리가 매일매일 엮어나가는 날짜 속의 세상도 그렇다. 한두 번 봄이 온 듯하더니 겨울공화국을 방불케 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 말이기도 하겠다. 매달 지리산의 식물 공부를 하는 모임이 올 2월에는 주중에 있었다. 멤버가 부산과 대구의 교사들이라 방학을 맞이해서 그렇게 일정을 잡은 것이다. 월요일 청학동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자면 일요일 오후에 내려가 근처에서 일박을 해야 한다. 그냥 갔다가 올라오기엔 왠지 아쉬웠다. 두 동무에게 주말을 통영서 보내자고 했다. 나의 수작이 엉큼한 것은 ..
꽃샘추위가 길어집니다. 보일러 기름값이 아까운 노인양반들은 여태 한 평 남짓한 전기장판에 몸을 지지고, 배싹 마른 사람 날아갈 듯 부는 동풍에 아직도 겨울옷을 들여놓지 못합니다. 그래도 마을회관에나 가야 사람구경할 수 있었던 철은 지나고 논밭에도 제법 사람들이 기어 나와 들판은 뭔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주말마다 아홉시 뉴스 첫 자락을 차지하는 것은 상춘객들이지만 놀기 좋은 날은 일하기도 좋은 날이라는 불편한 진실. 논 갈고 볍씨 파종하면서부터 봄 ‘싸가지’, ‘싹수’에 대한 걱정은 몇 십 년 농사를 지어 온 어른들에게도 언제나 365일 한 해 밥 빌어먹는 무게입니다. 저녁 때 갖는 소소한 술자리에서는 한숨 쉬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에휴, 날 따땃해진 게 이제 일만 남았네.” “못자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