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한국에서도 화제다. 정가는 물론이고 장삼이사들에게도 관심거리이다. 그만큼 이변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국 대선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 때문이다. 힐러리도 관심을 끌 만한 정치인이긴 하지만, 샌더스와 트럼프가 일으킨 ‘바람’이 없었다면 이만큼 미국 대선이 먼 나라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게 흥미로운 것은 샌더스 ‘열풍’이라기보다 트럼프 ‘광풍’이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교육학자인 헨리 지루는 최근 한 방송과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어떤 정치인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의미심장한 논평을 남겼다. 트럼프의 태도나 성격을 거론하면서 대통령 후보 자격..
한국의 현실을 빗대 부르는 ‘헬조선’ 또는 ‘지옥불반도’라는 말에서 어떤 정치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봇물을 이루는 것 같다. 바야흐로 선거철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시도가 성공적일 것이라고 섣불리 예단하기는 어렵다. 물론 통계적으로 청년이 야당에 투표할 확률이 높고, 지금 당장 코앞에 닥친 현실에 대한 불만이라면 무엇이든지 동원해야 하는 기성 정치권으로서 청년세대가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헬조선’ 현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용하는 것까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헬조선’이라는 말을 근거로 지금 사회에 대한 청년세대의 불만이 극에 달해서 마치 금방이라도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 같다는 진단은 어딘가 석연치 않을 뿐만 아니라 충분하지도 않다. 특히 ‘헬..
이른바 ‘서울시민’을 대표한다는 어떤 분들이 박원순 시장을 ‘직권남용 및 공연음란 방조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고 한다. 고발 내용으로 적시되어 있는 ‘공연음란’이 무엇인지 봤더니 지난 6월28일 열린 ‘퀴어문화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서울광장은 건전한 여가선용과 문화활동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유로운 통행을 방해하거나 혐오감을 주는 행위, 영리를 목적으로 한 광고 및 판매 행위, 취사행위, 주류 반입 행위 등을 못하게 돼 있다”는 것이고, 문제의 퀴어문화제에서 “동성애자들은 실오라기 같은 팬티 하나만 착용한 채 전신을 노출하는 등 성적 수치심과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반하는 논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단 박 시장이 동성애와 관련해서..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혐오에 대해 불행의 원인을 없애버리려는 자아의 상태라고 설명했다. 혐오라는 것은 일시적인 마음 상태라기보다 특정 대상에 대한 일관된 성향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혐오의 문제는 혐오라는 감정 자체에 있다기보다 혐오하는 대상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누가 ‘무엇’을 혐오하는지, 이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이 문제는 그 ‘무엇’을 결정하게 만드는 규범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규범은 어떤 것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나누는 기준이고,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이 기준은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성혐오나 동성애혐오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대체로 여성과 동성애자는 소수약자에 속한다는 전제에서 이런 합의는 자명한 것이다. ..
“죽는 것은 정말 짜릿한 모험일 거야”라고 피터 팬은 말한다. 영국의 극작가 제임스 배리가 쓴 유명한 동화 의 주인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모험에 빗대어 말하는 ‘어린이’ 피터 팬의 진실은 우리에게 그렇게 친숙하지 않다. 아무리 악당이라고 해도 사람의 팔을 잘라서 악어에게 던져준 것이나 후크를 사지로 몰아넣을 때 낄낄거리면서 사악한 미소를 짓는 것이나 동화에서 그려지는 피터 팬의 이미지가 천사 같아야 할 동심에 부합한다고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원작을 윤색해서 만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피터 팬은 결코 순진무구한 ‘어린이’로 등장하지 않는다. 행복하게 살고 있던 세상 물정 모르는 웬디와 동생들을 꾀어내 가출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진실을 알고 나면 절대 환영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리퍼트 주한 미 대사에게 자상을 입힌 김기종씨에게 경찰이 국가보안법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이라고 언급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은 이 사건에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 않고, 한국 정부만 애가 달아 좌불안석하는 인상이다. 초임장교 임관식에 참가한 대통령은 재차 “어떤 외부의 방해에도 한·미관계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번 사건이 ‘외부의 방해’라는 묘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경찰이 이적표현물 소지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분향소 설치 혐의 등을 언급하면서 김기종씨의 범행과 이른바 ‘종북세력’의 관계를 입증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논리의 허술함만..
화려한 서울의 도심을 지나다보면, 고시원이라는 간판을 단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과거에 고시원은 사법시험을 비롯해서 ‘고시’라고 불리던 각종 국가시험을 준비하던 사설 공부방이었다. 이른바 한국이 ‘압축 성장’하던 시절에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가장 빠르게 타고 오를 수 있는 수단이 이른바 ‘고시’였다. 타고난 경제적 형편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노력으로 출세해서 영광과 찬사를 동시에 받을 수 있는 성취가 ‘고시 합격’이었고, 이런 까닭에 ‘고시생’이라는 신분은 현재의 곤궁을 미래의 가능성으로 유예할 수 있는 훌륭한 보증이었다. 그러나 로스쿨 도입과 사법시험의 폐지가 논의되고 있는 요즘에 이런 고시원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이제 고시원은 고시생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비싼 주거..
프랑스의 시사만평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성역 없는 풍자’를 날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주간지는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 ‘성역’에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종교지도자들도 포함시켰다. ‘성역 없는 풍자’는 근대 이후 계몽된 시민의 권리 중에서도 최상에 속하는 것이다. 일찍이 많은 사상가들이 앞다퉈 요구하고 옹호했던 권리가 바로 ‘표현의 자유’였고, 이 자유를 실현하고 있다는 척도로서 ‘성역 없는 풍자’에 대한 개인이나 사회의 개방성이 거론되곤 했다. 이런 관점에서 ‘표현의 자유’는 근대 문명의 원리로 간주되었고, 이를 억압하거나 배척하는 행위는 야만으로 규정되었다.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에 난입해서 만화가들을 살해한 알카에다를 자처하는 무장 괴한들의 행위를 야만이라고 부르는 서방 세계의 입장도 이런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