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의 충격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 참사는 4월16일 여객선 하나가 바다로 침몰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서 총체적인 국가에 대한 문제제기로 번지는 양상이다.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목할 수 있는 것은 ‘공동선’(common good)에 기초했다고 믿었던 국가가 재난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이나 선정적인 보도에 따른 심리적 외상은 이런 망연자실한 심정을 구성하는 다른 축이다.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반어적 의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믿었던 ‘공동선’에 대한 합의가 붕괴했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 모두가 ..
북한의 소형 무인기 논란에 대해 국방부 대변인이 민주국가나 법치국가라면 무인기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재치 있는 반응들이 잇따랐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대형 무인기로 군사작전을 펼치는 미국은 도대체 뭐냐는 촌철살인의 질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만행을 부각시키려다가 소형 무인기 논란에 대응하는 국방부 논리의 취약성을 드러내버린 꼴이다. 근대 이후에 민주나 법치를 자임하지 않는 국가도 없고, 군사작전을 수행하지 않는 민주국가나 법치국가도 없을 텐데, 국방부 대변인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풍자의 즐거움을 잠시 제쳐두고 살펴보면 국방부 대변인이 그처럼 발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은 ‘민주국가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여기에서 ‘그런 짓’..
‘안철수 현상’은 이제 민주당과 하나가 됨으로써 다른 단계로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 윤여준 전 장관의 지적처럼, 어떤 현상에 개인의 이름이 붙는 경우는 드물다고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아무런 정치적 배경도 없던 ‘안철수’라는 인물을 유력한 정치인으로 등장하게 만든 과정은 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철수’라는 개인은 한국의 상황에서 낯선 것이긴 하지만, 이미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서구에서는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만 한국은 그 과정이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식습관이 서구화하면서 이른바 ‘선진국형’ 성인병이 우리에게도 발생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의회정치를 절대적인 가치로 여긴 이들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정당이 조변석개..
1905년 10월13일 중국 상하이 YMCA에서 의미심장한 강좌가 열렸다. 강사는 옌푸라는 정치평론가이자 번역가였고, 주제는 정치학이었다. 옌푸는 최초로 영국 유학길에 올랐던 중국학자로 토머스 헉슬리나 허버트 스펜서의 저서들을 중국어로 번역해서 이름을 얻었다.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그가 번역한 19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서들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헉슬리의 는 사회진화론을 아시아의 정신세계로 도입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은 두 전쟁에서 드러난 일본의 군사력을 ‘국가발전’의 증표로 생각했다. 일본이 일찍이 서양처럼 입헌국가를 설립했기에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국가발전의 단계를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8년 만에 다시 찾은 런던, 지하철 파업이 한창이었다. 자동화 시설을 도입해서 인원을 감축하려는 방침에 대한 지하철 노조의 반발이었다. 지하철 파업이 시작된 다음날,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의 교수들도 파업에 동참할 예정이라고 한 지인이 알려줬다. 지하철 파업에 비해 “배부른 파업”으로 비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사회적 반향도 크게 불러일으키기 어렵겠지만, 학생들과 교수들이 처우개선을 위해 연대의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지인도 파업을 하긴 하지만, 관심을 끌기는 역부족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국도 점차 “한국처럼” 노동조건이 바뀔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토니 블레어 정부 시절 어떤 교육부 관계..
일전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을 때였다. 쿠알라룸푸르 중심가에 있는 차이나타운을 구경하는데,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호객꾼이 ‘가짜’ 명품시계를 팔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사지 않겠다고 피하는 나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귀찮긴 했지만, 사라고 들이대는 논리가 재미있었다. “이 시계는 진짜와 다를 게 없는 가짜 시계다.” 진짜와 같은 가짜 시계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한국의 경우도 가짜 명품을 제조해서 팔다가 적발되었다는 보도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 어떤 불법 제조업자는 실제로 명품가방 위탁업체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뒤에 계속 가짜 명품가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식 직원으로 만든 가방과 그렇지 않을 때 만든 가방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처럼 동일한 재료와 기술을 사용해서 전문가도 구별하기 어렵..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을 달고 게시판에 나붙은 한 대학생의 대자보가 파장을 일으킨 몇 주였다. 각계각층에서 “안녕하지 못하다”는 호소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급기야 대자보는 국회 게시판까지 이르렀고, 김무성 의원마저 손글씨 대자보를 붙이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정색하고 말하자면, 대학에서 시작해 퍼져나간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이 최종 지점으로 국회에 도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순식간에 지나간 과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중정치에서 대의정치로 수렴되는 ‘안정화’를 대원칙으로 삼는 정치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민주주의는 바람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하고 나면 무엇인가 찜찜하다. 이 열풍이 ‘대선불복..
이제 박근혜 정부를 일컬어 ‘유신독재’의 부활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원성이 드높지만, 정작 책임자로 지목받고 있는 대통령은 묵묵부답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실마리는 지난 18일 새해 예산안과 관련해 국회에서 있었던 박 대통령의 시정연설에 담겨 있다. 교착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해법을 요구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런 기대를 배반하며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정치의 중심은 국회”라고 못 박았다. 국회에서 합의하면 자신은 기꺼이 수용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대체 이 상황은 무엇일까. 박 대통령은 자신의 책임을 국회에 전가해버린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정연설의 의도라기보다 이렇게 행정부의 수반이 정치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