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문학창작을 배운다고요? 네, 배웁니다!’ 이것은 프랑스 언론 매체 ‘뤼마니테(L’Humanite)’의 기사 제목이다. 필자는 ‘세계의 문예창작 현황’이라는 주제 아래 지난 주말 개최된 학술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던 중, 2012년 이후 프랑스의 대학에서 문학창작 전공을 개설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취업률을 잣대로 2010년대를 기점으로 축소, 통합, 폐과의 수순을 밟고 있는 한국 문예창작학과의 흐름과는 대비되는 형국이어서 고무적으로 다가왔다. 2013년 파리8대학에까지 개설되면서 문예창작 전공을 개설한 대학은 현재 4곳으로 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창작보다는 작품 분석과 토론에 치중해왔던 프랑스 대학 교육 전통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학창작을 배운다고요? 네, 배..
줌파 라히리의 는 “작가에게 모국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새삼 제기한다. 식민지나 이민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를 부모로 두었거나 직접 체험한 작가들의 경우, 언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북대서양의 섬나라 아일랜드는 800년 가까이 잉글랜드의 식민지배를 받은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일랜드 작가들의 경우, 민족어이자 모국어인 게일어가 아닌 식민지 제국 언어인 영어로 글을 써야 했고, 자국 문학사가 아닌 영국 문학사의 일원으로 세계 독자에게 소개되어 왔다.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 등이 그들이다. 조이스는 식민지 조국으로부터 스스로 유배의 길을 택해 문학을 조국으로 삼아 유럽 각국을 전전하며 소설 쓰기에 투신했다. 그 여정에 생산한 는 20세기..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소설 은 클러리사 댈러웨이라는 런던 상류층 중년 여성이 화자인데, 울프는 클러리사의 30년 전과 후의 회고담 속에 전쟁 후유증으로 환각증을 앓고 있는 셉티머스의 이야기를 끼워서 끌고 간다. 그 결과 소설의 중심 화자는 클러리사지만 중간 중간 노출되는 셉티머스의 장면들로 인해 독자는 두 사람의 생애, 두 겹의 서사를 경험하게 된다. 클러리사는 고단한 하루를 보낸 지인들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파티를 여는 것을 본분으로 생각하고 사는 여자이고, 셉티머스는 매 순간 죽음의 유혹에 시달리는 청년이다. 그렇게 흘러오고 흘러가는 어느 하루, 클러리사는 파티에 집중하고, 셉티머스는 죽음을 단행한다. 울프는 이 둘을 런던이라는 한 공간 속에 대비시킴으로써 이 세상에 만연한 정상과 비정상, 삶과 죽음..
삼월, 순간순간 자라나는 봄빛 속에 사진집을 펼쳐놓고 오며가며 바라본다. 더도 덜도 말고, 일기를 쓰듯 하루 한 장, 한 장면과 만난다. 사진 한 장에 누군가의 일생, 어느 골목의 역사, 어느 계절, 어느 하루의 흐름이 담겨 있다. 휴(休), 공(空), 하늘, 옛 동네, 구석, 인생, 산, 항구, 균형, 구름, 기다림, 무수함, 바다, 바위, 부처, 환희, 몸, 사라짐(滅). 이들은 사진집의 지향점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궁극의 리스트’이다. ‘궁극의 리스트’는 움베르토 에코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문학예술을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하면서 명명한 제목이다. 를 위해 에코가 선택한 장면은 190컷, 고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20세기 앤디 워홀의 팝아트까지 아우른다. 에코의 방법론에 따라 다양한 궁극의 ..
삶이 예술이 되는 계기가 있다. 예술가의 작품이란 어린 시절 엄마 또는 삼촌 또는 누이의 어깨너머로 접했던 세계의 비밀스러움이 내면화되어가는 과정이다. 나를 작가이자 시네필로 만들어준 것은 유년기의 영화구경이었다. 극장의 장막을 걷고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의 떨림, 더듬더듬 자리를 찾아 앉을 때 들려오던 아련한 경음악소리, 어둠을 가르고 스크린까지 뻗어가던 한 줄기 빛, 그리고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 그날 어둠 속에 펼쳐진 세상의 황홀과 비극, 삶의 진실에 사로잡혀 누군가는 배우가 되고, 누군가는 작가 또는 감독이 된다. 소설과 영화는 매체는 다르지만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공통점이 있다. 감독의 고유한 연출법을 미장센이라고 일컫는데, 발자크의 소설들에서 초기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첫 장면과..
ㅁ에세이스트이자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프루스트라는 작가의 삶과 문학을 대상으로 한 권의 책을 썼는데, 제목이 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이 출간되어 있는데, ‘소설 말고’라는 부제가 생략되어 있고, ‘자기계발서’로 분류되어 있다. 매혹적인 제목 짓기 감각과 철학적 사유를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 덕분에 이 책은 프루스트가 누구인지 모르는 독자라도 읽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실제 큰 사랑을 받았다. 프루스트는 10대 때부터 오직 소설가가 되기 위해, 삶을 소설 쓰기를 준비하는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는 먹고, 자고, 보고, 만나고, 느끼고, 갈등하고, 사랑하고, 상처받고, 절망한 모든 것을 소설 쓰기의 질료로 사용했다. 결과물이 125만 단어로 축조된 라는 기나긴 소설이다. 일찍부터 그토록 꿈꾸고 ..
엄마가 해운대 달맞이 언덕으로 오신 것은 팔순을 넘긴 이듬해였다. 달맞이 언덕은 달이 제일 먼저, 그리고 휘영청 밝게 떠오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달과 마찬가지로 하늘과 바다 사이, 해가 떠오르는 순간과 빛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마디로 빛이 충만한 공간이다. 엄마는 4년 반, 햇수로 5년 동안 달맞이 언덕에 머무르시다 큰 오라버니 곁인 일산 호숫가로 옮겨 가셨고, 반년 후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향년 86세, 봄이었다. 엄마가 떠나시고, 두 번의 봄이 왔다 갔지만, 아직도 나는 엄마한테 제대로 “잘 가요”라는 인사를 못 드리고 있다. 이 시대, 딸로서, 인간으로서 도리를 하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끝나지 않는 자문과 죄책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달맞이 언덕으로 오셨..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면세점 거리를 통과할 때면, 향수 매장에 오래 머물곤 한다. 그곳이야말로 세계 향수 시장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향(香)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시절 보들레르의 시편들을 만나면서부터이다. 그의 ‘상응’이나 ‘이국의 향기’ 같은 시들을 읽으며 이국적인 향들과 맞닥트렸다. ‘바람에 떠돌고 내 코를 부풀리는, 타마린드 나무의 푸르른 향’, 안식향(때죽나무 수액), 용연향(향유고래 수컷 창자 속 이물), 사향(수컷 노루나 수컷 고양이) 등 다채로운 향들을 단어로 접할 뿐 맡아볼 수 없어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곤 했다. 향에서 향수로 생각을 확장해 나간 것 역시, 보들레르의 산문시 ‘개와 향수병’을 읽으면서이다. 화자(話者)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