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구두 한 짝을 손에 들고 맨발로 미친 듯이 뛰었다. 다른 한 짝은 광장 어딘가에 뒹굴고 있을 것이었다. 정문 쪽에서 학생들이 밀집한 광장으로 최루탄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학생들은 사방으로 몸을 날려 뛰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최루탄은 태양빛을 받아 까맣게 보였다. 내 눈에 그것은 새처럼 보였다. 까만 새들은 수십마리씩 떼로 날아와 광장에 떨어졌다. 이웃 학교에서는 한 청년이 그 새에 맞아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그를 애도하는 물결이 학교 안팎,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선뜻 광장으로 나서지 못하고 도서관 창가를 서성이던 나 같은 겁쟁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광장은 사방으로 길이 통하는, 자유로운 곳이다. 그러나 그날 나는 광장 한가운데에서 두려움이 목까지 차올라 죽을 것 같았다. ..
소설 에서 주인공 소년 모모는 평생 양탄자를 팔며 세계를 떠돈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에밀 아자르는 소년의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사람 사이 사랑의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하밀 할아버지는 죽어가면서 니스로 향하는 꿈을 꾼다. 에밀 아자르는 자신의 마지막 소설인 에서도 주인공의 마지막 행선지로 니스를 지목한다. 니스는 어떤 곳인가. 유럽 여행자라면 한번쯤 꿈꾸는 휴양지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이곳은 북아프리카와 아랍,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흘러들어온 이민자들의 고달픈 삶이 얼룩진 애환의 항구이다. 이들의 신산한 삶과 자유의 꿈은 이곳 출신인 에밀 아자르와 르 클레지오의 소설들에 아로새겨져 있다. 에밀 아자르의 본명은 로만 카제프,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그..
이탈리아 북부의 중세 고도(古道) 베로나는 셰익스피어의 연애 비극 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다. 여행자들은 베로나역에 내리면 도심의 아레나(원형극장)를 따라 에르베 광장 근처 줄리엣의 집으로 향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고백했던 이 집 발코니를 소재로 몇 해 전 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줄리엣의 발코니’라 불리는 이곳 벽에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메모들이 도배하다시피 빼곡히 붙어 있고, 매일 사랑에 빠진 이들의 편지가 날아든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애틋한 첫사랑의 고백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연들이다. 설레는 첫사랑이든, 쓰라린 실연이든 베로나는 사랑의 성지(聖地). 50년 전 불발된 첫사랑의 약속을 찾아 초로의 여인이 나타나기도 하고, 약혼 여행을 왔다가 헤어지고 이곳에서 미지의 편지..
프랑스 파리는 거리와 광장 못지않게 정원과 공원으로 이루어진 도시이다. 내가 처음 공원이라는 공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 ‘몽소 공원에서’라는 샹송을 들으면서이다. 옆 사람에게 말하는 듯한 이브 되퇴이유의 음성과 담백한 멜로디에 가본 적 없는 공원의 호수와 벤치, 하늘과 그 위를 날아가는 새들을 한가로이 스케치해보는 것이었다. 몽소 공원이 파리의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모른 채, 노래 가사와 시적인 울림에 빠졌다면, 몽수리 공원은 김채원 소설을 읽으면서 꿈꾸게 되었다. 그녀의 등은 소설이 단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이야기 상품이 아니라 언어로 빚은 예술, 그 너머 경지임을 알게 해주었다. 몽소 공원은 파리 도심 샹젤리제 뒤편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고, 몽수리 공원은 파리 남쪽 교외 경계에 있다. 내..
종강 시즌이다. 이번 학기 스무 살 어름의 문학도들과 소설의 다양한 형상을 점검하고,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한 편의 짧은 소설로 창작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어문학과 학부 전공 수업이지만 한국어문학, 문예창작학, 국문학, 교육학, 철학생명윤리학, 사학, 경영학, 국제관광학까지 다채로운 전공 학생 50명이 참여했다. 이론과 창작실습을 통합한 새로운 형태의 수업을 개설하며, 처음엔 이 많은 인원으로 소설 창작까지 도모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땅을 개간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감행했다. 사람마다 고유한 얼굴 생김새가 있고, 눈빛이 있고, 음색이 있고, 화법이 있듯, 각자 자기만의 문장과 문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스무 살 어름의 문학도들이 처음 소설이라는 것을 쓰려고 ..
위화의 는 중국 문화대혁명 이후 찌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허삼관이라는 ‘피 파는(賣血) 사내’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 보여주는데,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허삼관이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요리를 하나씩 만들어주고, 아이들이 맛있게 받아먹는 장면이다. 피를 뽑아 팔아 생계를 꾸리는 가장(家長) 허삼관과 그 가족은 늘 가난에 시달리는 상황. 이 피 파는 사내가 허기진 채 잠자리에 누운 아이들을 위해 깜깜한 허공에 대고 말로 만들어주는 음식은 ‘홍소육(紅燒肉)’이다. “고기가 익으면 꺼내서 식힌 다음 기름에 한 번 볶아서 간장을 넣고, 오향을 뿌리고, 황주를 살짝 넣고, 다시 물을 넣은 다음 약한 불로 천천히 곤다 이거야. 두 시간 정도 고아서 물이 거의 쫄았을 때쯤…. 자 홍소육이 다 됐습니다...
새벽에 낭보를 들었다. 소설가 한강의 영어본이 영국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한강의 수상 소식은, 가치에 비해 늦기는 했지만, 한국 소설의 존재감과 번역 작업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안겨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상작 는 3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집이다. 한국문학계에서 소설가가 1년에 문예지에 발표하는 단편소설의 최대치는 4편 정도, 대개는 2편 내외, 중편은 1편 정도이다. 소설가가 쉬지 않고 성실하게 작품을 쓰고 발표해서 한 권의 소설집을 출간하기까지는 3년 내외의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다. 2004년 중편 를 시작으로 이 문예지에 발표됐고, 2007년 한 권으로 출간됐다. 소설은 자본주의에 적합한 속성을 지닌 문학 장르이다. 사상과 예술을 담는 고유..
사월이 가고, 오월이 와도 숨쉬기가 편치 않다. 최근 한국소설계에 유독 참사와 재앙, 애도의 서사가 많이 생산되는 이유를 묻는 일은 무의미하다. 김애란의 단편 ‘물속 골리앗’은 이렇게 시작한다.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 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창비) 이 소설은 철거의 폭력과 공포에 내몰린 재개발 공간과 한 달째 쏟아지는 폭우 상황에 고립된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애란의 또 다른 단편 ‘하루의 축’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기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