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에 바쳐진 소설 (2014)의 독일어판 출간을 앞두고 독일 취재팀이 내한했을 때 작가 한강은 그들과 국립5·18묘지를 방문했다. 무덤들 사이를 거니는 작가를 영상에 담고 싶다는 취재진에게 한강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중히 사양한다. “저는 그냥 한 권의 책을 쓴 것뿐인데요. 저에게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는 그저 ‘한 권의 책’만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5·18 훼손 시도에 준엄한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큰일을 했다. 누적 판매량 40만부를 넘겼고 구매자의 80%는 2030 청년들이라고 한다. 이 책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1985년 이래로 교과서 역할을 해온 의 개정판(2017)이 잇따라 나왔을 때는 쐐기를 박는 듯해 통쾌하기까지 했다. 이미 몇 번 읽은..

“그분이 떠내려갔거나 혹은 월북을 했거나 거기서 피살된 일이 어떻게 정권의 책임입니까?” 서해에서 북한군이 우리 국민을 사살한 사건에 대해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 발언이다. 북한을 규탄하면 모를까 문재인 대통령의 잘못을 따지는 것은 정쟁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얼핏 보면 맞는 말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대통령이 무엇을 할 수 있나. 일각에서는 우리 고속정이 출동해서 구출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북한이 지배하는 수역에서 작전을 벌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북한 해군이 대응에 나서서 자칫 군사적 충돌이라도 벌어진다면 심각한 상황이 된다. 그러나 이런 발언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무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

드넓은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어떤 비상구를 통해 어디로 달아나는가. 지금 산꼭대기에서 사진 찍는 사람은 무한창공으로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붙드는 중이다. 한 물리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세상을 때리고 나간 빛은 우주 한구석에 습자지처럼 쌓여 있다고 한다. 그 빛의 끈을 발견하여 가져온다면 지상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실현할 수 없는 건 상상하지도 않는다는 말에 기댄다면 이는 전혀 허무맹랑하지도 않을 일! 감쪽같은 시간에 운반되어 가는 세월이 참 빠르다. 같은 시월에 속하건만 올해 추석도 벌써 까마득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그때의 일은 흐지부지 없었던 일이 되고 마는 것. 재난 탈출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한 영화 와 다큐 의 한 장면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질의가 회자됐다. 류 의원은 2018년 김용균씨가 숨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올해 9월11일 화물차 운전기사 사망사고가 또다시 발생한 것을 통해 발전소와 배전 노동자들의 현장 안전문제를 물었다. 김용균씨와 같은 작업복을 입고 안전에 대한 감수성 부재를 질타하는 그의 목소리가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기업 책임을 강화하고 보호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입법이 진행 중이다. 정의당은 21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중대한 인명 피해를 주는 산업재해를 일으킨 사업주와 기업의 처벌을 강화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6월 발의했고, 입법 촉구를 위해 한 달 넘게 1인 시위를 진행 중이다. 지난 1월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 예방 책임주체를 사업주..
검찰 수사가 미진하거나 의혹이 일면 특임검사가 임명된다. 주로 검사비리를 수사하기 위해 2010년 도입된 특임검사로도 모자라면 특별검사가 등장한다. 이렇듯 단판으로 끝내질 못한다. 두세 번 수사한 사건이 무수히 많다. 굵직한 사건에서는 어김없이 3종 세트가 등장한다. 검찰의 수사가 때로는 선택적 수사, 때로는 정치권력 눈치 보기 수사라서 불신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수사 삼세번은 낯설지 않다. 마치 삼심 재판을 하는 것 같다. 한참 뜨거워진 라임·옵티머스 사태도 그럴 태세다. 법무부와 대검찰청이 충돌하며 낯뜨거운 설전을 펼치고 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격돌이 점입가경이다. 검찰총장의 부실 수사 책임론도 제기된 상황이다. 장관의 감찰 지시에 맞선 총장의 신속 수사 지시로 여론전은 뜨거워지고 있..

산에 간다. 나무를 보다가 나무 너머가, 꽃을 보다가 꽃 너머가 궁금해졌다. 나무를 보는 시선은 나무에서 끝나지 않고 자꾸 옆으로 번진다. 옆에는 나무나 풀을 받쳐주는 것들이 있다. 무정한 바위와 돌들이다. 풀이나 나무처럼 단독자로서 하나하나 제 이름을 갖추지 못했기에 더욱 마음이 간다. 돌은 시간이 압축된 증명사진들 같다. 안동의 암산은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바위가 많을 줄 알았는데 소나무가 더 많았다. 안동답게 훤훤장부 같은 훤칠한 소나무일 줄로 기대했건만 그저 빼빼마른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보고 믿는다 하지만, 본다는 것만큼 위험하고 불안한 감각도 없다. 그저 겉만 보고, 앞만 보고, 일부를 잠깐 볼 수 있을 뿐이다. 두 개나 달려 있긴 하지만 눈이란 본디 그렇게 생겨 먹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돼 버립니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의 발언으로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문제가 되자 그는 언론이 자기 발언의 취지를 왜곡했다고 해명했다. 원래는 저 문장 앞에 “토착왜구”라는 주어가 붙어 있는데, 보수언론에서 이를 빼고 마치 자신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 모두 친일파가 된다’고 말한 것처럼 왜곡 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언어학은 크게 세 분야로 이루어진다. 통사론·의미론·화용론이 그것이다. 이는 각각 언어의 세 요소, 즉 문법·어휘·맥락의 세 요소에 조응한다. 예를 들어 통사론은 낱말과 낱말을 결합하는 규칙을, 의미론은 각각의 낱말들이 가진 표준적 의미를, 그리고 화용론은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문장의 용도를 탐구한다. 이제 언어의 이 세 ..

오후에서 저녁으로 접어드는 시간은 묘하다. 운 좋으면 귀신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둠은 밤의 나라에서 파견한 스파이처럼 은미하게 포진한다. 저무는 태양은 편평한 땅이 실은 저처럼 둥글다는 사실을 하늘을 배경으로 슬쩍 보여준다. 저 놀라운 변화를 육안으로 목격하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어렵게 산에 가서 논과 습지가 어울린 곳을 훑었다. 이런 순간에는 어디에 눈을 두어도 황홀하다. 고지대의 논에는 벼가 다 익었다. 땀방울처럼 맺힌 이삭은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점점 휘청거리는 벼의 줄기. 모든 식물은 햇빛을 이용하여 광합성을 한다. 몇몇 예외적인 게 있다. 곤충을 잡아먹어 영양분을 취하는 식충식물도 그중의 하나이다. 차가운 금속성의 물이 번들거리는 습지는 식충식물들이 좋아하는 장소이다. 질컥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