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웅 논설실장 언제부터인지 국민정서란 말이 부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되곤 한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때인 2008년 신년사에서 “선진화를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에서 시작하자. …‘떼법’이니 ‘정서법’이니 하는 말도 지워버리자”며 법치를 강조했다. 그 후 그는 수도 없이 법치를 강조했고, ‘떼법’을 개탄했다. 그가 말한 정서법은 국민정서법을 줄인 말이다. 국민정서를 빙자한, 감성적 규범을 들먹이지 말고 진짜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말인즉슨 옳다. 국민정서란 말은 다분히 추상적이다. 이 말을 쓰는 사람에 따라 뜻이 달라질 여지가 크다. 정치인들이 “국민정서를 감안하면…”이라거나 “국민정서상 맞지 않는 행위…” 운운하면 그건 십중팔구 아전인수 격 주장을 펴기 위한 포석이라고 보면 된다. 국민,..
김철웅 논설실장 미국에서 6년 만에 광우병 소가 발견됐다. 심각한 사태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광우병 통제체제가 허술한 미국에서는 언제라도 터질 일이 터진 셈이다. 문제는 그 다음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정부는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견되면 즉각 (쇠고기)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가 범국민적 촛불시위로 번지던 2008년 5월8일 일간지에 광고를 그렇게 냈다. 국민들은 당연히 정부가 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4년 만에 ‘실제상황’이 발생하자 정부는 말을 바꿨다. 즉각 수입 중단은커녕 검역 중단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검역 강화를 하겠다고 한다. 수입위생조건이 어떻다느니 핑계만 잔뜩 늘어놓을 뿐이다. 수입조건을 보면 수입 중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
최우규 정치부 차장 . 중국 송나라 때 문학가인 유의경이 지은 책이다. 후한 말에서 동진 말까지 제왕·귀족·문인·승려 등의 언행이 수록돼 있다. 당시 문사들은 현학과 청담(淸談·명리를 떠난 맑고 고상한 이야기)을 잘해야 인정받았다. 인물 품평은 청담의 주요 과제였다. 책에 나오는 36종류의 품평 중 용지(容止·준수한 용모와 훌륭한 행동거지)편에는 “하후현의 맑은 인품은 해와 달이 가슴속에 들어있는 것과 같고, 이풍의 흔들거리는 모습은 옥산(玉山)이 장차 무너지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상예(償譽·감상과 칭송)편에는 “유담이 강관을 ‘말을 잘하지 못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잘한다’고 평했다”고 적혀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런 다양한 품평이 나온다. 최근 주목받는 품평은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향..
신형철 | 문학평론가 지금껏 살아온 삼십 수년의 시간을 한 번 더 살고 나면 나는 70대 중반의 노인이 될 것이다. 아직은 멀었다고 해야 하겠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꽤 빈번히, 노인이 된 나를 상상해 보게 된다. 집요한 인간적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지혜로운 평온함에 이르겠거니 하는 기대를 해보기도 하지만, 반대로, 육체는 늙어가는데 욕망이 더 강렬해진다면 그 아이러니를 어찌할 것인가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현대사회는 노년의 초연과 지혜를 칭송하지만 그들의 욕망과 육체는 불편해한다. 1935년생인 오에 겐자부로 선생이 일흔이 되던 해에 출간한 대담집에는 이런 문답이 있다. “건강 유지를 위해 하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까?” “줄곧 클럽의 ..
정제혁 사회부 기자 지난해 9월30일 열린 청와대 확대비서관회의.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 정권은 돈 안 받는 선거를 통해 탄생한 특성을 생각해야 한다”며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므로 조그마한 허점도 남기면 안된다”고 말했다.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고, 이국철 SLS그룹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과 관련해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르는 등 대통령 측근의 비리가 본격적으로 터져나오던 시점이다. 이 대통령은 유난히 희화나 풍자의 소재가 되는 경우가 잦은데,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말도 그렇다. ‘청와대 직원들은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지녀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겠지만, 세간의 평판과는 확연히 동떨어진 이 대통령의 ‘낯..
강상중 | 도쿄대 대학원 교수 한국의 총선거가 끝났다. 서울에서도 지방에서도 거리에는 후보자들의 얼굴사진이 붙은 깃발이 나부끼고, 기업광고로 착각하기 쉬운 선거차량이 거리를 누비는 광경이 펼쳐졌다. 후보자와 응원단은 손을 흔들어 환심을 사려 하고 확성기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일본과 흡사한 선거풍경이다. 이 시끌벅적한 선거기간이 지나고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여당의 선전, 야당은 기대 이하의 결과로 마무리됐다. 여당은 정당의 간판을 바꾸고, 당의 얼굴(비상대책위원장)을 여성으로 바꾸는 것으로 의석의 격감을 막고, 그럭저럭 과반수를 확보하게 됐다. 여당인 새누리당과 현 정권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성장에서 복지로 중점을 옮기는 것에 의해 거둔 신승(辛勝)이지만 현 정부에 대한 국민여론의 강한 반발을 감안한다면..
류근일 | 언론인 한국의 진보라 할까 좌파라 할까 하는 진영은 이제 상대방에 대한 싸움에만 파묻힐 게 아니라 자신들이 누구이고, 누구여야 하는가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한국의 진보는 과연 잘하고 있나? 이런 질문은 바깥에서보다 내부에서 먼저 제기되어야 상식적이다. 진보의 지평에는 최근 두 개의 논점이 떠올랐다. 의 막말 파동이 그 하나였다. 또 하나는 1990년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잔재들의 등판을 둘러싼 의혹이었다. 이 두 가지는 한국 진보의 품격과 정당성이 걸린 중요한 논점이었다. 진보의 끝자락이 저질, 쌍욕 판으로까지 가 닿는 게 과연 좋은 것인지, 그리고 한국 진보가 ‘너무 먼 좌(far left)’하고 짝짜꿍이 되는 게 과연 좋은 것인지가 논란이 되어야 했다. 막말과 관련해 문성근 민주통합..
김동규 | 동명대 교수·언론광고학 27세의 홍안(紅顔), 이준석 새누리당 비대위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20일자)에서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인 과반의석 점유로 당이 혼란스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여당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총선 결과였던 게다. 후폭풍이 당연하다. 진보적 유권자 상당수가 4월11일 늦은 밤, 패닉상태에 빠져들었다. 정치허무주의라는 유령이 대한민국 하늘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즉각적으로 KTX 민영화가 들먹거리고,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는 언론의 의제설정에서 완연 사그라드는 추세다. 정치평론가들의 4·11 총평을 요약해보면 대략 세가지다. 첫째는 ‘차려준 밥상도 못 먹는’ 민주통합당의 무능이다. 밥상을 통째 걷어차고 바닥에 흘린 밥 알갱이나 주워 먹은 꼴이다. 갈라먹기 공천의 절정은 민주당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