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로 유명했던 고 정운영씨(1944~2005)를 나는 교수로 기억한다. 큰 키에 중후한 목소리, 조리 있는 말솜씨. “결혼은 하셨나요”라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제가 결혼도 못했을 것처럼 보이나요”라고 유머로 답하던 여유까지. 30여년 전 강의실에서 본 그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한국의 대표적 진보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던 그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 무슨 얘기를 했을까. 요즘의 상황이 답답해 인터넷을 찾아보는데 그가 1988년 8월 한겨레신문에 쓴 칼럼이 눈에 띄었다. ‘성장, 안정, 복지…그래서?’라는 제목이다. “우산 장수와 나막신 장수에게 각기 딸을 시집보낸 부모가 가지는 걱정, 그것은 경제정책의 입안자들이 지닌 고민의 내용을 아주 잘 설명해 준다. 우산과 나막신을 파는 데 고..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달러를 넘어섰다. 1960년대 초 100달러에 불과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놀라운 성장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고속성장의 이면에는 산업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수도권 집중화 문제는 물론 지역 간 발전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소득 양극화와 부의 편중 현상도 심화되었다. 수십년 동안 이어져온 제조업 중심, 수도권 중심의 불균형 성장정책이 낳은 결과물들이다. 불균형 성장이 남긴 상흔은 농업과 농촌에서 특히 현저히 나타났다. 농업이 장기 성장정체에 빠지면서 농가소득은 도시의 60% 수준까지 추락했다. 텅 빈 농촌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기고, 초고령사회로 들어선 지도 오래다. 전국 읍·면 농촌지역의 43%가 소멸위험지역이라는 암울한 연구결과도 나왔다..
통계청이 13일 ‘2019년 1월 고용동향’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1월 취업자 수는 2623만2000명으로 지난해보다 1만9000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취업자 수는 재작년 30만명 수준의 증가에서 지난해 10만명 정도로 떨어졌다. 이에 정부는 올해 15만명 증가를 목표로 했는데, 첫 달부터 암담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당연히 실업자 증가와 실업률 상승 현상이 나타났다. 실업자는 20만명 이상 급격히 늘면서 122만4000명에 달해 2000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1월 기준)를 기록했다. 실업률도 4.5%로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았다. 일자리 정부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로서는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정부는 “지난해 1월 취업자 수가 크게 증가한 데 따른 기저효과에, 노인일자리사업 조기실시에 따른 ..
어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발표 내용을 훑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뭘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다. 세상에, 고향 촌구석에 고속전철역이라니! 9년 뒤면 설, 추석에 편히 갈 수 있다며 설레야 하나. 한편으론 씁쓸하다. 이게 필요한 짓인가 싶어서다. 자, 대한민국 지도를 펴보자. 당신이 대통령, 장관이라면 어디에다 뭘 만들어주겠는가. 일차적 기준점은 비용·편익이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그중에서도 강남권에 뭐든 깔아야 손해를 안 본다. 지방도 대도시 중심으로 엇비슷하다. 왜냐. 가장 욕을 덜 먹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는 사람이 가장 많다. 비용·편익이 높게 나온다. 이렇게 개발해온 게 그동안의 관성이다. 이런 현실에서 영남 골짜기를 관통하는 고속철이라니, 대단한 정치적 결단이다. 균..
‘예타’(예비타당성조사)입니다. 국가부도 사태를 겪으면서 재정관리의 절실함을 인식한 1999년에 태어났어요. 무분별한 토건사업의 남발을 막고 공공투자사업의 효율성을 담보하려 김대중 정부가 도입한 제도죠. 예타 도입 전에, 정권의 이해와 지역이기가 맞물려 추진된 국책사업이 얼마나 끔찍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는지는 당시 지방공항의 실패가 여실히 보여줬어요. ‘유학성공항’(예천공항), ‘노태우공항’(청주공항), ‘김영삼공항’(양양공항), ‘김중권공항’(울진공항) 등으로 불린 지방공항들은 세금만 축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했어요. 1300억원이 투입된 울진공항은 취항할 항공사가 없어 개항도 못하고 비행훈련센터로 바뀌었어요. AFP가 2007년에 ‘10대 황당 뉴스’로 꼽았으니 말 다했죠. 예타는 비용편익만으로 타당성..
신재민 전 사무관의 폭로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신재민씨의 독특한 스타일, 정치권의 과도한 공방 등으로 사안이 복잡해졌지만, 내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 당시 차관보가 카톡방에 보낸 문자이다. “핵심은 GDP 대비 채무비율을 덜 떨어뜨리는 겁니다.” 아직까지 공식적 부정이 없는 걸로 봐선 실제 문자라고 판단된다. 당연히 재정정책을 두고 청와대와 기획재정부가 협의할 수 있다. 당시에 진행되었다는 재정운용 방향 논의도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등장한 ‘채무비율 조정’은 지나치게 정무적이다. 차관보가 자신의 주관적 느낌을 자조적으로 적은 글일 수도 있지만 설령 그러하다 해도 고위 공무원이 정책결정과정에서 권력 핵심부에게서 그러한 분위기를 느꼈다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2기 청와대’가 출범했다. 대통령비서실장과 정무수석·국민소통수석이 교체됐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친문(親文)’ 인사의 전진 배치다. 노영민 신임 비서실장과 강기정 정무수석은 과거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선대위 중책을 맡았거나 문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이던 시절 정책위의장을 지내는 등 대표적 친문 인사로 꼽힌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참모진에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측근을 기용하는 건 장단점이 다 있다. 인재풀의 과감한 확대로 청와대 전면 쇄신을 기대했던 시민들은 친정체제 구축에 부정적일 수 있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에 대한 직언과 소통이 더 활발히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청와대 개편 필요성은 진작부터 제기돼 왔다. 그동안 청와대는 부처 간 불협화가 공공..
모두가 문재인 정부 탄생이 대한민국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대변혁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고 미래로 가기 위한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산적한 개혁과제는 논란만 무성한 채 성과는 없고, 사회적 갈등은 심화하고 있다. 진보·보수 간 갈등에 더해 이제는 세대, 계층 간 파열음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급기야 그동안 쭈뼛쭈뼛하며 여론의 눈치를 보던 국정농단 비호세력들까지 반발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다. 국내외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감은 여전히 시민들을 짓누르고 있다. 집권 3년차를 맞은 새해는 문재인 정부나 대한민국 미래에 더없이 중요한 시기다. 더 늦기 전에 새 정부가 달려온 지난 1년7개월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국정운영 방식을 총점검해야 할 때가 됐다. 무엇보다 내각의 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