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와 이어진 새파란 하늘, 날개를 쫙 편 까마귀, 그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아이와 토끼”의 모습이 펼침면으로 전개된 그림은 (제주도꼬리따기 노래, 권윤덕 그림, 창비)의 인상적인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림에서 까마귀는 바다로 물질 나간 엄마를 발견한 듯 아래를 바라보며 방향을 바꾸는데, 정작 아이는 엄마가 아니라 정면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저널리스트이자 그림책 평론가인 최현미는 “이 장면을 펼칠 때 저는 종종 딸에게 심호흡을 해보자고 합니다. 그냥 넘기기엔 참 깊고 긴 시간이 담겨 있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들숨과 날숨의 그 순간, 딸이 높은 곳을 날고 있는 주인공이 되길 바랍니다. 그 옆에서 저도 깊은 호흡을 합니다”라는 감상을 적은 바가 있습니다. 벤자민 라콩브의 (..
저는 ‘87’이 지고 ‘97’이 뜬다는 칼럼을 한 신문에 쓴 적이 있습니다. 87은 민주화의 원초적 체험인 6월항쟁을 말하고, 97은 세계화의 원초적 체험인 IMF 외환위기를 말합니다. ‘87’이 민족이나 국가가 지향하는 ‘정상’이나 ‘중심’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이들이 주도한 시대였다면, ‘97’은 오솔길일지언정 자기만 만족하면 그만인 사람들이 욕망을 한껏 발산한 시대였습니다. 삶의 방향성을 추구하던 사람들도 삶의 무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말을 바꿔 탔습니다. 제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저는 2005년 말에 블록버스터 영화 을 막내딸과 함께 보았습니다. 딸은 이 영화가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지를 알고 싶어 을 본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까지의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는..
지난 6월25일 페이스북에는 한 공중파 방송이 보도한 이란 기사가 링크되어 있었다. 기사를 링크한 이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도서관은 ‘가짜란 말인가’라며 분개하고 있었다. ‘지혜의 숲’은 지난 6월19일 파주출판도시에 문을 연 공간이다. 만든 이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신개념의 도서관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도서관의 3대 구성 요소는 시설, 자료(책), 인력이다. 이미 존재하는 시설(건물)에 거대한 책장을 설치하고 책만 진열해놓으면 도서관인가? 자료는 데이터베이스화되어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혜의 숲’은 처음부터 데이터베이스화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8m 높이에 책을 진열해놓아 일부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지 않는..
(갈라파고스)의 저자인 강수돌 교수는 이 시대 가정의 이미지는 더 이상 ‘보금자리’가 아니라 ‘버스정류장’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른과 아이 모두 일중독에 내몰리는 처지인지라 집이라는 ‘버스정류장’에 간간이 들러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만 챙겨 먹고 가볍게 떠난다는 것이지요.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그들은 앞만 보고 달려가다 옆 사람을 팔꿈치로 가격해 좌절시키는 것을 일상화하고 있습니다. (RHK)의 저자인 김경집 전 가톨릭대 교수는 ‘팔꿈치 사회’를 화두로 한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열 매김이 한심하지만 이른바 ‘좋은 대학’에 지원이라도 하려면 내신이 2등급은 되어야 한다. 그런 대학을 졸업해도 이른바 ‘좋은 직장’에 들어갈 확률은 아무리 넉넉히 잡아줘도 20%가..
“한국에서도 사정은 그다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1980년대부터 일본 사회에서는 모든 공동체가 무너져버렸습니다. 친족공동체의 유대는 약해졌고, 도시에서는 지역공동체가 거의 기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예전처럼 회사가 종신고용제를 채용한 시대에는 몇십 년이나 함께 기거하는 사원들이 의사(擬似) 가족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과주의, 능력주의의 도입으로 점차 연봉계약 사원이 늘어감으로써 가족적인 친밀감은 찾아볼 수 없어졌지요. 도회지의 임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귀속할 공동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메멘토)의 공동저자인 우치다 다츠루와 오카다 도시오가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20년’을 살아내고 나니 고령화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 되었고, 시장은 축소되었으며, 성장..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7월10일, 새누리당 대선 후보 출마선언을 하면서 ‘국민 행복’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며, “경제민주화 실현, 일자리 창출, 복지의 확대”를 “국민 행복을 위한 3대 핵심 과제”로 삼으셨습니다. 2012년 11월16일에 다시 경제민주화 공약을 발표하면서 “경제적 약자 권익 보호, 공정거래 관련법 개선, 대기업 집단 관련 불법행위와 총수 일가 규제, 기업지배구조 개선, 금산분리 강화” 등을 경제민주화 5대 분야로 나누고 35개 실천과제를 제시하셨습니다. 하지만 (강수돌, 이상북스)에 따르면 “쌍용자동차 국정조사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노인 기초연금 제공과 4대 중증환자 부담 무료화, 대학 반값등록금과 고교 무상교육, 군복무 기간 단축, 그리고 정리해고 요건 강화와 경제민주..
일본 대학들은 1, 2학년 교양과정에서 인문과학에서부터 사회과학, 자연과학 그리고 예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일반교양(기초적인 소양)’을 쌓을 수 있는 커리큘럼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교양과정을 영어로는 ‘리버럴 아트’라고 부릅니다. 리버럴은 ‘자유’를 의미하고 아트는 ‘기술’을 뜻하니, 리버럴 아트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학문”이라고 번역됩니다. 이 단어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그리스에는 노예제도가 있어 노예와 비노예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학문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배움이 없는 자는 노예로 산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토대학에서 ‘의사결정론’과 ‘기업론’ 강의를 맡은 다키모토 데쓰후미는 벤처기업의 성공사례를 중심으로 한 실천적인 기업경영방법과 그 ..
고희를 맞이한 작가 서영은은 에서 1995년에 작고한 30년 연상의 작가 김동리와의 사랑을 써늘한 시선으로 담담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작가로서 삶의 진실,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실이라는 작가는 “사랑은 목숨 같은 거야. 목숨을 지키려면 의지를 가져야 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니 목숨을 지킨다고 생각”하라는 연인의 격려에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재미교포인 이서희는 자전적 에세이 에서 자기 삶의 관능과 욕망을 농밀하고도 솔직하게 털어놓아 한 작가로부터 ‘한국의 사강’이라는 호칭까지 얻었습니다. 작가가 만약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 성장 과정에서의 성 경험까지 쓸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