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기억을 컴퓨터 속에 무한대로 외재화(外在化)함으로써 순간적인 정보처리가 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미 웬만한 개념어나 사물의 이름을 입력해 검색하면 너무나 많은 정보가 떠서 도저히 소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컴퓨터는 불필요한 정보를 스스로 삭제하지 못합니다. 꼭 필요한 핵심을 제외한 것을 삭제할 수 있는 능력은 유일하게 인간만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물리적인 시간과 심리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준다면 정말 좋겠지요. 그래서 미래의 책은 “바로 이 ‘시간’과 ‘여유’와 ‘시행착오’를 대신하는 것이 돼야만 할 것”입니다. 2001년 졸저 에서 처음 언급한 이래 저는 누누이 이 점..
“경기 침체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돈을 쓰려 하지 않는다. 샐러리맨 월급은 제자리걸음이고, 매일 퇴직자 수천명이 거리에 쏟아진다. (중략) 주가가 오르면 친구에게 삼겹살이라도 한턱 내겠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다. 집값은 떨어지는데 전셋값은 폭등한다. 집주인, 전세입주자 모두 불안해서 더욱 허리띠를 졸라맨다. 돈을 안 쓰니 동네 슈퍼, 음식점, 빵집, 노래방도 몽땅 불황으로 아우성이다. 그러니 세금도 안 걷힌다.” 지난 7월10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영수 조선경제i 대표의 칼럼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에서는 지금의 경제위기가 심각함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미국의 저리자금과 중국의 강력한 성장률에 의존하던 이머징 국가들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연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수출 의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넘게 지났습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 후 실물 경제가 갈수록 침체되고 있음에도 정치권은 소모적인 정치적 이슈만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래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큰 위기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한심한 정치권 때문에 올해도 그런 위기를 겪을 것 같은 공포감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증거를 대라고요. 큰 위기에는 소설이 잘 팔립니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이영도의 와 이우혁의 이 등장하며 판타지 소설이 크게 떴고, 2003년의 카드대란 때는 ‘귀여니 신드롬’이 불면서 인터넷소설 열풍이 불었으며, 2008년의 글로벌 외환위기로 경제성장이 멈추다시피 했을 때에는 성장소설 붐이 대단했습니다. 작년만 해도 독자들은 소..
웹툰 원작의 영화 가 5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동원했다 해서 서둘러 보았습니다. 역시 어머니 이야기더군요. 어려울 땐 웃고 울리는 감동의 가족 이야기가 뜨게 되어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등장한 신경숙의 가 대표적입니다. “평범한 나라에, 평범한 집에, 평범한 아이로 태어나서, 계속 평범하게 살다 죽는” 게 꿈인 간첩 원류한(김수현)은 어머니의 안전만 책임져 주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사람입니다. 밤마다 북의 친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그는 남쪽의 엄마인 달동네 슈퍼 주인에게 “엄마 아프지 마요”라는 글을 담벼락에 새겨놓고 떠납니다. 엄마에게 매달 20만원씩 받은 월급 모두를 입양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동네 여인에게 줍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는 남의 엄마가 몰래 챙겨준 월급통장을 넘겨봅니..
대학 선배인 한 고등학교 교사를 30년 만에 만났습니다. 도덕 교사인 그는 이제 퇴직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2011년부터 초·중·고교에 적용된, 사회 과목 수업 등을 특정 학기 또는 학년에 몰아서 집중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집중이수제’로 말미암아 도덕 과목의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답니다. 정년을 몇 년 앞둔 나이에 이 학교 저 학교 떠돌아다니며 수업을 해가면서까지 버티고 싶지 않다는군요. 그는 2006년부터 초·중·고교에서 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시간에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교육체제인 ‘방과후학교’도 비판했습니다. 방과후학교가 사교육비를 경감하고 양극화에 따른 교육격차를 완화하겠다는 취지대로 운영된 것은 첫해뿐이었답니다. 다음해부터는 영어와 수학 등 주요 과목의 보충수업으로 변..
가정의 달인 5월에 우리가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지요. 50대 시인 장석주는 (한빛비즈)에서 “여든을 코앞에 두신 어머니의 세상을 꿰뚫는 지력(知力)과 방안에 앉아서도 천리 밖을 내다보는 경륜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요. 아직도 미망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는 어머니의 지력과 경륜에 견주면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에 불과”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 딸을 둔 신달자 시인의 에세이 (민음사)은 꿈을 반쪽도 이루지 못하고 너무 빈곤한 처지에서 35년 전에 눈을 감으신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사모곡입니다. 이제 고희에 이른 시인은 식어 가는 엄마 손을 잡을 어떤 힘도 없을 정도로 자신이 가장 불행했을 때 어머님이 세상을 뜨신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신 시인은 “이 세상에 엄마라는 존재..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인사불성으로 취해서 남보다 일찍 귀가하는 버릇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술자리에서마저 이런 행태가 잦으니 그에 대한 소문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인기 있는 몇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화끈하게 술을 샀을 뿐만 아니라 일일이 택시비도 나눠줬습니다. 다음날 페이스북에는 술자리 참석자들이 그를 칭송하는 글들이 일제히 올라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열심히 ‘좋아요’를 눌러댔습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속게 되고,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공격적인 목소리에 시달리고, 모욕당하고, 비방당하는” 일이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소통의 도구인 소셜미디어가 “어린 누리꾼들을 고독과 우울증으로 내몬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속합니다. 그런데..
문화사회학자 엄기호는 “편만 남고 곁이 파괴된 사회”를 분석한 (창비)를 펴냈습니다. 단속은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하는(斷續)’ 것을 의미합니다. 같고 비슷한 것에는 언제나 접속해 있지만 낯선 것(타자)이나 공적인 것과는 단절합니다. 또한 자신의 “의견을 아예 제시하지 않거나 불가피한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드러내기 위해 자기검열 혹은 스스로를 단속(團束)하는 경향”이나 삶의 연속성을 잃은 “ ‘연속의 반대’로서 단속의 뜻도 갖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동일성에 대한 과잉접속’과 ‘타자성에 대한 과잉단속’으로 양극화된 사회가 단속사회입니다. 이런 사회가 된 것은 스마트폰과 스마트패드, 스마트TV를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호모스마트쿠스’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새 종족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