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친구가 사회로 돌아왔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내리 낳는 동안 7년 가까이 경력이 단절된 친구다. 원래 일하던 분야와 상관없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경력을 살려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니 더욱 기분이 좋다.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아이 둘 가진 엄마가 야근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곳이 어디 흔한가? 오랜만에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한 친구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밝고 활기차다. 그런데 근무 시간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란다. 낮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 시간을 제외하면 딱 4시간. 하루 8시간 근무하는 보통 직장인의 절반이니 당연히 월급은 얼마 되지 않는다. 월급도 시간도 애매하니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그 시간이 엄마들한테 얼마나 좋..
“김제들 융도(戎稻) 쌀 옥보다 윤나도록 깨끗이 찧고, 닭국은 깨즙 넣어 부드럽게 끓이고 잉어회에 곁들인 알싸한 겨자장. 부추김치는 자못 매콤하고 미역국은 푸른빛 더욱 감도네. 무는 사철 내내 먹기 좋아 채소 가운데 으뜸이라. 은실처럼 가늘게 채 쳐 상에 올리니 차림새가 조촐하네.” (金堤戎稻飯, 精鑿潤於玉. 鷄瀋荏삼滑, 鯉膾芥醬馥. 䪥葅味稍辣, 海帶羹更綠. 蔓菁食四時. 菜族爲宗祖. 縷切銀絲細, 登盤粲可數.) 길가의 콩잎이 누렇게 타는 삼복, 전라도 장계를 지나던 종4품 장파총이 그 마을 백정집에 저녁을 청한다. 가장과 삼형제가 도축만이 아니라 장사에도 힘써 부를 이룬 집이었다. 그런데 주인은 고명딸 방주를 시켜 앞서 본 저녁을 차리고도 제대로 된 식기가 없어서 부끄러웠다. 도리어 나그네가 아무렇지 않았..
몇 년 전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가 있다. 이라는 정치코믹로맨스이다.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의 작가 김은숙이 이례적으로 ‘정치’를 다룬 드라마이기도 하다. 종영한 뒤에도 가끔 다시 꺼내보게 하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데, 아마도 현실정치에 대한 환멸감이 극에 달했을 때 찾는 판타지나 환각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인구 13만명이라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7년 동안 시장실 커피 심부름만 하던 10급 공무원 신미래이다. 전 남친의 빚 때문에 밴댕이 아가씨 대회에 나가고, 시 당국이 상금을 빼돌리려하자 1인 시위를 하며, 결국 시장이 되어 시민을 위한 진정한 ‘시정’을 펼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물론 엘리트 정치인 ‘조국’과의 달콤하고 코믹한 로맨스와 동지애가 중요한..
“사장님, 일이 너무 힘들어요, 작업장이 너무 추워요. 목에서 까만 핏덩이가 나와요.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힘들어요. 시너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요. 발이 퉁퉁 부었어요. 못하겠어요. 쉬고 싶어요. 쉬고 싶어요”는 한강의 기적이 찬양되었던 시대에 우리 하늘의 절반을 지탱하고 있던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절규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72년에 유신체제를 갖추면서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경제발전의 전략으로 삼았다. 공장들이 늘어나면서 한국 경제는 1970년대 내내 연평균 약 8%씩 급속한 성장을 경험하게 되는데, 사람들의 삶과 일하는 방식 또한 크게 변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생활수준이 오르고 장밋빛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공장에서 가혹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이 당..
2016년 5월17일. 강남역 인근에서 한 여성이 살해됐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여성들은 강남역 10번 출구로 모여들었다. 색색의 포스트잇이 붙었다. 슬픔과 공포, 분노의 마음들이 그려졌고, 당신이 바로 나라는 고백, 잊지 않겠다는 다짐, 이 세계를 바꾸어나가겠다는 약속 등이 빼곡하게 적혔다. 무고한 죽음에 대한 애도가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번져갔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다. 우리에게 그 1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무엇보다 한국 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요동쳤다. 2015년 온라인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일었던 페미니즘 운동이 드디어 거리로 나섰다. 다양한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담론은 확장되었으며, 페미니즘 시장 역시 형성되었다...
‘최순실 게이트’를 목도해야 했던 작년 어느 날, 문득 대통령의 ‘대’를 구성하는 한자어가 궁금해졌다. 크다는 뜻의 ‘大’와 대신한다는 뜻의 ‘代’ 중 하나일 것 같은데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사전을 찾아보고는 조금 우울해졌다. 사실 짐작은 하면서도 아니길 바랐던 단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한자어로 ‘大統領’이었다. 번역하면 ‘크게 거느리고 다스리다’라는 뜻이 될 것이다. 나는 라는 책을 쓰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대리대통령’으로 규정지었다. 그것은 우선 그가 최순실이라는 인물의 대리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자신의 몸으로 존재하거나, 자신의 언어로 발화하거나, 자신의 사유로서 행동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도 올림머리라는 ‘만들어진 몸’..
- 5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5월이 되었다. 어릴 때는 5월이 마냥 좋았다. 봄 날씨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기념일들이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길가에 연등이 나란히 걸리는 걸 보는 것도 좋았고 어린이날에 가족끼리 놀러 가는 것도 좋았다. 커가면서 5월은 점점 부담스러운 달이 되었다. 어버이날과 스승의날에 해야 할 선물을 고민하는 일부터 갖가지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기꺼이 하고 싶은 일도 있었지만 주변 눈치를 보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도 생겨났다. 공익근무를 갓 마친 2012년 가을, 길거리에서 하는 설문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항목을 다 기입한 후 뒷장을 펴자 직업을 체크하는 칸이 있었다. 잠시 멍해 있었다. 나는 학생도, 직장인도, 그렇다..
- 5월 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다 합쳐서 두세 시간쯤 될까? 내가 이번 대통령 후보 토론회 및 선거 관련 TV 뉴스를 보는 데 쓴 시간이. 이것을 말하자 눈이 휘둥그레져서 “최서윤씨는 정치에 관심 많은 줄 알았는데….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이 그래도 되나?”라고 반문하는 이가 있었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봤다는 표정이었고 ‘민주시민’의 책무를 방기하는 자를 검거했다고 선언하는 음색이었다.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내가 사는 원룸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토론회와 TV 보도를 챙겨보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 열의가 있다면 소셜미디어를 통한 생중계나 다시보기 서비스 등을 이용할 수 있고, 나 역시 시도한 바다. 그렇게 힘겹게 챙겨본 것은 각자 ‘캐릭터’ 분석을 끝낸 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