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 대표팀이 파리로 입성하자 샹젤리제는 환영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대표팀 선수들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다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새롭게 탄생하는 분위기였다. 많은 이민자를 받아온 프랑스는 반이민정서가 팽배하고 히잡 착용 등의 문화적 충돌을 겪고 있다. 그런데 이번 우승으로 사회통합 분위기가 연출됐다. 프랑스 대표선수 23명 가운데 21명이 이민자 출신이다. 그중 15명은 아프리카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팀은 ‘레블뢰(파란색·대표팀의 유니폼도 파란색)’로 불리지만 유색인종 선수들의 활약이 뛰어나면서 ‘블랙·블랑·뵈르(흑인·백인·북아프리아계)’로 불리기도 한다. 이번 월드컵 우승이 인종과 종교의 화합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땅을 맞댄 독일은..
직전 대회 우승팀 독일 축구대표팀의 ‘캡틴’ 필립 람과 러시아의 슈퍼 모델 나탈리아 보디아노바가 피파 트로피를 들고 입장했을 때,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는 ‘황금의 엑시터시’가 울려 퍼졌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작품으로, 세 명의 총잡이가 욕망의 극한에 이르러 최종 승부를 겨루는 영화 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음악이다. 순간, 나는 탁월한 선곡이라고 생각했다. 월드컵 결승전이라, 전 세계 10억명이 몰입하는 최고 수준의 황홀경 아닌가. 과연 마지막 최종전은 10억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예측불허의 상황을 거듭하며 끝까지 극단의 황홀경을 선사했다. 누구도 연출할 수 없는 폭우까지 내려 450g도 안되는 축구공이 빚어낸 한 달의 여정을 시원하게 적셨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들이었다. 마지막 휘슬이 울..
메이저리그 탬파베이 데블레이스는 1998년 창단했다. 함께 생긴 팀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다. 애리조나는 ‘사막 방울뱀’이 팀 이름이다. 탬파베이는 ‘악마 가오리’다. 둘 다 신생팀답게 패기 넘치는 ‘쎈’ 이름을 썼다. 애리조나는 김병현 때문에 국내팬들에게도 친숙하다. 창단 3년째이자, 김병현이 뛰던 2001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탬파베이는 따라가지 못했다. 기를 썼지만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는 보스턴과 뉴욕 양키스 등 쟁쟁한 팀이 워낙 많았다. 우승은커녕 꼴찌를 도맡아 했다. 1998~2007년 10시즌 동안 9번 꼴찌였다. 100패를 넘긴 게 3번, 99패도 2번이었다. 팀 성적이 나쁘니, 돈을 벌기 힘들었다. 돈이 없으니 투자를 못하고, 성적은 계속 바닥이었다. 빈센트 나이몰리 구단주는 닦달했..
문재인 대통령이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에게 제안한 한국과 북한, 중국, 일본과의 2030년 월드컵 공동개최 구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동북아 평화 콘텐츠는 한반도 통일 이전과 이후 영원한 자산이고 스포츠로 보면 이를 기반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 많기 때문이다. 인판티노는 유능한 인물이다. 유럽축구연맹(UEFA) 사무총장 때 유럽챔피언스리그라는 상품을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국가대항인 유럽축구선수권대회 본선 참가국을 16개국에서 24개국으로 확대하는 것을 주도했다. FIFA가 각 나라에서 4~5개의 경기장을 활용해 적어도 2개 국가, 많게는 3~4개의 국가가 대회를 공동 유치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은 그가 관철시킨 월드컵 출전국을 2026년부터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확대한 것..
2018년 러시아 월드컵 한국·독일전을 앞두고 한국의 2-0 승보다 오히려 독일의 7-0 승 가능성이 더 크다는 해외베팅업체의 평가가 있었다. 그만큼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개최국 브라질을 7-1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8-0으로 패배시킨 독일 축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반면 스웨덴·멕시코전에서 부진했던 한국 수비진은 극심한 비난여론 속에 ‘멘털 붕괴’ 상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우려는 기우로 판명됐다. 한국 선수들은 세계최강 독일의 슛을 육탄으로 막아냈다. 부진에 대한 자책감과 팬들의 비난이 선수를 ‘죽기 살기’로 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떨어져 출전을 포기할 생각까지 품었던 장현수 선수는 “너 때문에 진 게 아니다”라는 동료들의 다독거림에 마음을..
미국 스포츠전문 매체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가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 대표팀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은 들러리”. 아, 화가 난다. 어쩌다 이런 촌평까지 듣게 되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 정작 당신네 팀들은 지역예선 5위로 탈락했잖아, 라고 소리치고 싶다. 아무튼, SI는 러시아 월드컵 32개국 전력을 6개 등급으로 분류했다. 우리 대표팀은 최하위다. 호주, 이란, 파나마,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튀니지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만약 우리가 저 6등급 팀들과 한 조가 되어 맞붙는다고 해도 16강이 가능할까, 조심스럽다. 개최국 러시아, 아시아의 강호들, 더욱 굳세고 빨라진 호주를 이길 수 있을까. 오스트리아 레오강 캠프에서 들려오는 소식 또한 상큼하지 않다. 사실상 ..
프로스포츠에는 ‘탱킹(tanking)’이라는 표현이 있다. 기름이 없으면 달리지 못하는 자동차처럼, ‘탱킹’은 경기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일부러 지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력보강에 힘을 쏟지 않는다. 성적은 당연히 바닥권이다. 미국프로농구(NBA)에서 시작됐다. 메이저리그(MLB)에서도 유행이다. 몇몇 팀들은 아예 시즌 전 ‘탱킹’ 가능성을 암시한다. “올 시즌, 우리는 성적보다 미래를 고민합니다”라는 말은 ‘탱킹’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이유는 간단하다. 순위를 떨어뜨린 뒤 신인드래프트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겠다는 계산이다. 신인드래프트는, 특히 북미프로스포츠에서 전력을 강화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고교 혹은 대학 졸업(또는 재학) 선수들을 지명한다. 직전 시즌 성적의 역순으로 선수들을 ..
수세기 전 영국에서 스포츠는 ‘여가놀이’를 뜻하는 말이었다. 저명한 문명사가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역작 에서 현대 스포츠의 기원을 18~19세기 초 영국의 여우사냥에서 찾는다. 사냥꾼은 총이나 칼은 물론 몽둥이조차 쓰지 못하고 오로지 사냥개만으로 여우를 추격한다. 사냥개와 여우, 사냥개들 사이의 경쟁을 지켜보면서 사냥꾼은 짜릿한 긴장감과 흥분을 즐겼다. 이는 상대방의 팔을 뽑아버리거나 심한 경우 목을 졸라 죽이기까지 했던 고대 격투기와 질적으로 달랐다. 현대 스포츠는 폭력이 통제된 ‘놀이’라는 것이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코치로부터 발과 주먹으로 수십 차례의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 뉴스를 보면서 한국에서 스포츠의 의미는 무엇일까 되물어본다. 운동선수에 대한 폭력은 한국 스포츠계의 고질적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