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박시백 선생의 만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만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릴 적 만화를 보는 것은 마치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내놓고 보기에는 뭔가 좀 애매한 책이었다. 집안의 어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내가 만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 경우만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남들도 그랬던 것인지 지금도 모른다. 어른들이 싫어하거나 말거나 나는 만화 보기에 푹 빠진 아이였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는 박재동 선생의 부모님이 하던 만홧가게 ‘문예당’이 있었고, 그곳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사람들은 어떤 유명한 분이 있으면 공연히 자신과 어떤 관계라고 엮는 습성이 있는데, 나 역시 그런 습성을 충만히 가지고 있다. 박재동 선생은 나와 절친한 친구의 형의 친구이다. 좀 복잡하지만 그렇다...
은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혹은 조선시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서가에게 둘도 없이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이 만들어진 내력은 알 만한 사람이 다 알기에 굳이 여기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이야말로 한국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책이라는 점을 강조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임진왜란 때 거의 모든 서적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도 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동경제국대학으로 1벌을 가져갔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6·25전쟁 때는 북한으로 또 1벌이 넘어갔다. 이건 한반도에 남아 있는 것이니, 을 여러 곳에 흩어둔다는 원래의 취지에 맞는지도 모르겠다. 또 북한과 남한이 각각 번역본을 내었으니, 분단이란 비극이 없었다면, 두 벌의 번역본은 생길 수 ..
의 존재, 그리고 청대 학자들의 저작이 조선후기 곧 17세기 후반부터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본격적인 것은 18세기다.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조 문인들은 를 본 적은 없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을 통해서 그것이 거대한 총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 본 적이 없는 책과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저술 형태는 상당한 관련성을 갖는다. 는 규모가 거대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어떤 원칙에 의해 다양한 종류의 책을 수합한 ‘총서’다. 이 총서라는 것이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예컨대 란 책을 보자. 이 책은 중국 한나라, 위나라의 책을 모은 것이다. 왜냐? 이 시기의 책은 매우 희귀하다. 그러니 한곳에 모아 놓으면 보기 편리하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로 명·청대에 와서 거대한 규모의 총서를 만드는 일..
는 만리장성 같은 책이라, 도서관이 아니면 소장할 수 없다. 그런데 도서관에 소장된 것이라 해도 이용하기는 무척 어렵다. 왜냐? 어떤 작가의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색인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색인은 한자의 배열 방법이 한국과 달라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이용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이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나 하나만이 아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으면 어떤 사람이 해결책을 낸다. 김쟁원이란 분은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 을 엮는다. 이 책을 나침반 삼아 저 만리장성에서 특정한 벽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만 가 디지털화되고 나서는 이 색인집의 위력도 사실 거의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조 이후 즉 18세기 후기 이후 조선 사람들은 에 대..
이왕 말이 났으니 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보자. 정조는 를 구하려다 을 구입했다. 정조가 어떻게 의 존재를 알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가 과연 의 규모를 알았는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는 운반하기조차 쉽지 않은 거창한 총서이기 때문이다. 한 질의 는 그 자체로 도서관이다. 지금 영인본 에는 ‘문연각사고전서(文淵閣四庫全書)’라는 이름이 책 앞에 붙어 있는데, 문연각이란 를 보관했던 건물이다. 엄청나게 큰 건물이니, 그 자체로 도서관인 것이다. 가 얼마나 대단한 총서인가는 그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수록된 책은 약 3500종, 권수로는 8만권쯤 된다. 1741년 천하의 책을 모두 모으라는 건륭제의 명령이 내려졌고 1771년 그 작업을 담당할 관청인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이 만들어졌다. 중국 천하의..
어느 날 19세기의 ‘자매문기(自賣文記)’란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부모의 장례를 치르느라 빌려 쓴 돈을 갚기 위해 자신과 딸을 얼마의 돈을 받고 누구에게 노비로 판다는 문서였다. 이 문서를 본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람이 자신을 팔다니! 또 부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빚을 낼 수밖에 없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관(冠)·혼(婚)·상(喪)·제(祭) 등 유가의 의례(儀禮)가 산 사람을 노비로 만들 정도로 압력이 되었던 사회가 눈에 선연히 보이는 듯했다. 도대체 사람이 예를 위해 존재하는가, 예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고문서 중에 ‘고풍(古風)’이란 것이 있다. 조선시대에 중앙에서 지방으로 가는 현감·군수 등 지방관의 자리는 360개쯤 된다. 그들이 발령을 받을 ..
1876년 개항 이후 근대가 시작되면서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전근대의 학문과 사상에서 찾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전근대의 학문과 사상을 당시에는 ‘구학(舊學)’이라고 불렀다. 구학을 버리고 근대적 지식과 사상을 배워야 하는 것이 시대의 책무가 되었다. 신학이 필연이라면 구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이지기도 하였다. 차분히 정리할 여유가 없었다. 대세는 신학이었고 구학은 조선을 정체시킨 주범으로 매도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구학을 담은 서적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또 한편 일본 등 외국으로 반출되었던 것이다. 구한말의 우국적 계몽신문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12월18일·19일·20일 3일에 걸쳐 ‘구서간행론(舊書刊行論)’이란 사설을 실어 고서를 수습, 보존하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일제의 조선 책 모으기에 대해 간단히 썼는데, 검토해야 할 자료가 더 있다. 일단 다음 자료를 읽어보자. ‘촌구(村句)씨의 선친 경성(京城) 수서(蒐書)항’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급히 귀가하여 여장을 차리고, 있는 돈을 모두 가지고 한걸음에 경성에 왔다.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인이 경영하는 ‘고본옥(古本屋)’을 내리 훑었다. 촌구씨가 착목(着目)한 것은 주로 고간(古刊) 당본(唐本)이었다. 그 가운데는 송판(宋版)의 이 있었다. 이러한 것에는 조선의 ‘고본옥’은 전연 눈을 뜨지 못하였는지 61책 송판이 겨우 3원 남짓. 이 금액으로 입수했으니 꿈같은 이야기이다. 당본의 옛것은 거의 1책 6전 정도로 살 수 있었고, 조선본보다 비교적 비쌌다.” 촌구씨는 이들 송판이나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