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조선의 남아여! ―백림마라톤에 우승한 손, 남 양군兩君에게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듯 찢어질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戰勝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勇士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홀병에 담거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쇠사슬에 네 몸이 얽히기 전까지도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에 양미간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다리는 매력이 있었더니라.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
다 녹아가는데, 아직 다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눈, 이를 “잔설殘雪”이라 한다. 연휴도 하마 이울고, 입춘 지난 골목엔 잔설이 남았을 뿐이다. 초순의 막바지니 이러다 양력 2월도 휙 지나가리라. 잔설의 감상이 연휴 막바지에 잇닿으매 떠오르는 시 한 수. 北風吹雪打簾波 북풍에 밀려온 눈보라에 발은 일렁이고 永夜無眠正若何 기나긴 밤 한숨도 못 잤으니 어쩌나 塚上他年人不到 무덤엔 해 지나도 찾는 이가 없으니 可憐今世一枝花 가련하다, 살았을 적의 일지화一枝花여 _소홍의 절구絶句 소홍小紅은 평안도 성천의 기생이란 사실과 한시 몇 수가 전해올 뿐 자세한 경력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대략 19세기를 살다 가지 않았을까 막연한 추측을 할 뿐. 서울, 평양, 전주, 진주의 일급 기생이 아닌 데다, 명사며 기남자들 사..
東飄西轉路岐塵 동으로 서로 헤매며 갈림길의 먼지를 뒤집어썼지 獨策羸驂幾苦辛 홀로 여윈 말 몰고 다니며 얼마나 고생스러웠는가 不是不知歸去好 돌아가는 게 좋은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只緣歸去又家貧 돌아가 봤자 내 집은 가난할 따름이니 _최치원, 2011년 1월도 다 보내며 최치원이 길 위에서 부른 “노래” 한 자락이 떠오릅니다. 시 가운데는 그냥 시도 있지만, 발라드에 엘레지까지 겸한 “노래”도 있지요. 민요에서 기원한 한시 갈래인 “악부樂府”를 가져다 설명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마음의 행로를 위의 예처럼 “부른”다면, 그야말로 시보다 노래에 가깝지 않겠어요. 최치원이 “동표서전東飄西轉” 하며 갈림길의 먼지를 뒤집어쓰는 길 위에 오르기는 그의 나이 12세 때입니다. 868년, 신라 경문왕 8년 신라 경주 ..
동네에서 오페라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하고 있는 덕분에 오페라를 들어보고 싶은 동시에 오페라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도 있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불려나가곤 합니다. 그 어떤 전문성도 뽐낼 수 없으나, 한국이라는 몹시 특수한 컨텍스트에서 강연자가 되었으므로, 가령 이런 식으로 말문을 열곤 합니다. 고심 끝에 마련한 시나리오지요. “안녕하세요. 오늘의 오페라 이야기 진행자 나사못회전입니다. 저는 ‘선생’ ‘강사’를 자처할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전문성이란 면에서 그렇고 한 분야에서 ‘숙련’이란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다만 오랫동안 음악과 드라마와 무대용 공연 전부를 좋아해왔고 덕분에 오페라하고도 몹시 친하게 지내는 사람입니다. 그냥 무대 공연이 좋고 오페라가 좋은 동네 아저씨, 마을 주민, 시민이 제 정체예요...
2011년입니다. 하고도 신묘辛卯년, 토끼해가 밝았습니다. 토끼는 사냥하는 짐승 가운데 가장 몸집이 작다고 할 여우한테 잡아먹히는가 하면, 심지어 집에서 기르는 개한테도 물리는 짐승이죠. 근력과 근육의 실감에서부터 약弱과 소小가 환기되는 짐승입니다. 그러기에 이 짐승이 제 약소를 딛고 머리 하나 꾀 하나로 저보다 모든 면에서 강强과 대大를 갖춘 그 무엇을 이기는 장면은 사람들에게 작은 쾌감을 안겨 주게 마련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어요. 연출에 따라 이 되기도 하고 가 되기도 하지만, 그 밑절미란 결국 토끼나 다름없 보통 사람들이 약자가 살아남는 과정에 보내는(승리까지도 아니고) 응원일 테지요. 보통 사람들, 대개 토끼의 약소에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삶을 오늘도 걷고 있겠죠. 한글딱지본(출처..
출가외인 그러나 언제까지나 아버지와 오빠와 아우와 함께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조선 시대의 양반가 여성이 혼인하지 않은 채 영원히 제 집안에 머물 길은 없었습니다. 허난설헌은 열다섯 살이 되던 1578년쯤 양천 허씨네만큼이나 명문가였던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에게 시집갑니다(연대 미상. 추정). 그런데 부부의 금슬은 좋지 못했던 듯합니다.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시집가고 12년 동안이나 과거 시험에 붙지 못했는데요, 이러는 사이 재주 높은 아내에게 열등감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허난설헌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공부를 많이 한 며느리가 ‘건방지고’ ‘되바라져’ 보였을까요. 이에 대한 허균의 기록은 몹시나 직접적입니다. “아아! (내 누이는)살아서는 금..
허난설헌의 공부 앞서 허엽과 허봉 들은 허난설헌에게 당대 어떤 여성에게도 허락된 적 없던 공부길을 열어주었다고 했습니다만 이 점은 허균이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바입니다. “형님들과 누님은 가정에서 글을 배웠다(兄姊之文得於家庭).” _허균, 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허난설헌의 삶을 기록한 허균이 “가정에서 글[여기서는 ”문학“으로 미루어 볼 만합니다]을 습득”했다고 하면서 남자 형제들과 나란히 일컬었습니다. 또한 허균은 “누이의 시는 더욱 맑고 굳세고 우뚝하고 아름다워, 당나라 현종 때나 대종 때의 수준보다 높았다”는 평가도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아버지 허엽, 큰형 허성, 작은형 허봉의 학문과 시문을 평가하며 나란히 쓴 것입니다. 이를 보면 허난설헌에게는, 적어도 허엽 직계 안에서만큼은 여느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