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권 능력이라는 말이 한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것은 1987년 대선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양 김의 분열로 결국 노태우에게 정권이 갔다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진짜 보수의 기획통들은 좀 다르게 설명한다. “당신들이 진 것은, 수권 능력이라는 단어에 잘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어쩌면 이 말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최초의 실용 언어일지도 모른다. 과연 그 시절의 YS와 DJ에게는 수권 능력이 있었을까? YS는 한나라당으로 들어가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고, DJ는? 노무현 시대까지, 조·중·동 프레임에 따라다녔던 ‘아마추어리즘’ 같은 것의 대중적 인식의 기원이 바로 이 말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말하는 ‘명품정당’의 이미지에도 이런 수권 능력의 이미지가 강하다. 지금은 당시의 민주화 세력에 붙..
지난 정부 때의 일로 기억난다. 녹색당 만든다고 한참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방법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녹색당의 주축 중의 하나가 농민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농업경제학의 원로들이 차라리 농민당을 먼저 만드는 게 더 빠르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주었었다. 스위스의 남쪽 이탈리아권은 농업지역이라서 경제적으로 낙후한 편인데, 여기에서 티시네티 지역을 중심으로 농민당이 실제로 생긴 적이 있었다. 나중에 엔지니어 등이 주축이 된 도시 전문가들과 합쳐지면서 극우파 정당이 되었다. 레닌에서 모택동 시절에는 농민들이 진보 세력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정치적으로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극우파 정당이라도 농민당이 있거나 정파로서 존재하는 편이 농업을 지키는 데 도움이..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일관되게 나빠진 분야들이 몇 개 있다. 사교육이 그렇고, 농업이 그렇고, 지하경제가 그렇다. 민주화되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기대가 제일 충족된 곳은 아마 인권 분야일 것이다. 하지만 정책을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면 민주화되어도 별 볼일 없는 분야들이 있다. 인권은 확실히 좋아졌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좋아졌다. 한국의 민주화는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와 시기가 겹쳐서 크게 힘을 못 쓴 이유도 있고, 80~90년대 민주화 시절에 너무 큰 얘기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제일 망한 걸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과학을 꼽을 것 같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제일 큰 타격을 받은 데가 과학 분야이고, 여러 부처로 찢겨서 아..
이명박 정부가 들어오면서 한국에 아주 독특한 취향을 가진 세 가지 사회적 집단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맨 앞은 초딩.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한국에서 MB를 가장 적극적이고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집단은 아마도 초딩이 아닐까 한다. “저기 보온병 간다”는 초딩들의 웃음으로 집권여당의 대표가 낙마하게 된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 아닌가? 어떤 정권도 초딩들과 이렇게 힘겹게 싸웠던 적이 없었다. 보온병 사건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돈을 내고 밥을 먹어야 하는 ‘오세훈 학년’이라는 5~6학년이 있다. 초딩들의 반한나라당 정서는 한국의 그 어떤 사회경제적 집단보다도 강한데, 한나라당은 완전 망했다. 진보정당이 집권할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경천동지할 변화가 오기 전에는 한나라당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다..
보통은 내무부라고 불리는 행정안전부(행안부) 장관은 정권 제2인자의 자리인 경우가 많다. 지금 프랑스 대통령인 사르코지가 내무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준비를 했었다. 전 대통령인 시라크와는 우파 내에서 라이벌 관계였는데, 그가 가장 강력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다음 정권을 노린 셈이다. 시라크가 대통령을 준비하면서 절치부심, 결국 파리 시장이라는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게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을 대통령 전초전으로 노렸던 바로 그 전략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행안부 장관은 다음 대통령이 가는 자리, 이렇게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지금 행안부 장관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국민이 있을까? 한때 유명했던 앵커였던 맹형규 장관이지만 국민들은 이제 그런 사람이 누군지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다. 그 대신 경..
민주노총 아저씨들이 보면 기겁을 하면서 저것도 운동이냐 할 그런 운동들이 시민 진영에는 종종 있다. 몇 년 전에 채식주의자들이 조그만 단체를 꾸릴 때 저게 운동이냐, 그런 목소리들이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난 겨울 구제역 파동 때 맹활약했던 카라, 그들의 모체가 바로 채식주의였다. 별의별 운동단체와 활동가들과도 일해 본 기억이 있다. ‘꼴페미’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여성 근본주의, 그중에서도 가장 강성인 영 페미니스트들과도 중요한 일들을 같이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나도 잘 적응하기 어려운 게, 평화 근본주의자들과 생태 영성주의자들이다. 비밀스러운 종교, 밀교의 느낌을 접할 때, 가끔 내가 가지는 상식이 시험에 든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절대 평화, 내 안의 평화..
마초지수라는 수치를 내보고 싶었던 것은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지역별로 혹은 단체별로 얼마나 그 지역이 마초 성향이 강한가, 그런 걸 지표로 내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물론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도 아니고 마초에 대한 간접 지표들을 뽑아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서 몇 년째 마음 속에만 가지고 있고 실제로 해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몇 개의 작업 가설을 만들어본 적은 있다. 한국에서 마초지수가 가장 높은 지역은 어디일까? 여성들과 겸상을 아직도 잘 허락하지 않고 어머니와 아들이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지 않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는 안동이나 의성 같은 곳이 아주 높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에 마초지수가 차이가 있을까? 이런 것도 오래된 질문 중의 하나인데 별로 그럴 것은 아닌 듯..
이명박 정부의 인기가 요즘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같다. 정부 근처에서 줄 서기 좋아하는 인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대통령 인수위원회이다. 인수위 갔다가 청와대 중책 혹은 장·차관, 그게 한국 엘리트 남성들의 보장된 출세길이다. 반대로 임기말 청와대는 아무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자리가 된다. 공무원들은 ‘인공위성’이라고 부르는데, 괜히 잘못 갔다가 정권 바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망하는 정부 말년 청와대에 가면, 다음 정권 내내 인생이 고달파진다. 세상 인심이라고, 정권 초에는 어떻게든 줄 대서 청와대 가고 싶어하던 공무원들이, 최근에는 죽어라고 도망가서 청와대는 안 가려고 하는 듯하다. 세상사, 다 이런 것 아니냐 싶게, 민주당에 줄 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공무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