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이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안도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일부에게는 악몽이 시작되는 날이었을 것이고. 나는 오랫동안 같이 활동했던 시민단체의 동료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넓게 보면, 한국에서는 두 개의 대안 세력이 아주 좁은 방에 모여들었던 적이 있었다. 총선연대 등 각종 연대회의 등을 통해서 많은 인재들이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머리를 맞대던 시절이 한 번. 그리고 2004년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하기 직전과 직후, 한국의 인재들이 여의도 민주노동당 당사로 모여들었던 적이 있었다. 노회찬, 심상정은 물론이고,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 목수정 같은 사람들이 다 이 때 좁은 방에서 복닥복닥거렸다. 두 그룹 모두 이후에 풍비박산, 흩어지기 직전이었지만 그 때의 시민단체 인재들은 박원순과 함께 활로..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서울시장 선거가 생겨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각지도 않던 이상한 선거 국면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6개월은 조선왕조 500년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대체적으로 맞는데, 이번 경우에는 정말 딱 들어맞는다. 이번 선거가 시작할 때 내가 예상한 것은 박원순의 인품과 한나라당의 마타도어(흑색선전)의 맞대결, 그 정도이다. 미안하지만, 시민운동을 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높고 높은 지도자라고 생각했던 ‘박변’은 5%의 인지도, 박원순의 파생 상품에 다름 아니었다. 설마 안철수와의 단일화 없이, 혹은 안, 박, 나, 그 3자 구도에서도 여전히 박원순이 지금의 지지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지난 서울시장 선거, 노회찬이 죽어라고 만든 수..
한국의 임시 조직 중 대표적인 것이 선거 때 만들어지는 일명 ‘캠프’라고 불리는 것이다. 우파들이 운영하는 조직이나 회사는 많이 경험해 봤는데, 불행히도 한나라당 캠프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다. 독자들을 위해서 나경원 캠프에 대한 취재나 인터뷰도 해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불편을 끼치지 않고 부드럽게 만날 방법이 없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박원순의 선거캠프가 이 시점에서 가지는 실험적 중요성은, 선거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이런 단기적인 문제보다도 오히려 조직론적인 특징에 있다. 이 임시 조직이 보여주는 특징들은 다음 대선 이후 청와대 등 정부 운영의 원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실험이 성공해야 사람만 바꾸는 게 아니라 진짜로 사회 질서를 바꿀 수 있는 것 아닌가..
시민단체를 분류하는 방식이 몇 가지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활동영역별로 환경운동, 여성운동, 감시운동, 이렇게 분류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최근에 점점 중요해지는 분류는 중앙형 조직 혹은 전국형 조직과 풀뿌리 시민단체로 구분하는 것이다. 말은 풀뿌리가 중요하다고는 했지만, 미진한 것은 맞다. 박원순의 경우는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시절 중앙형 시민운동에 익숙했다가 희망제작소 이후로 풀뿌리형 운동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한국의 풀뿌리 단체는 아직 대중적 스타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반면에 참여연대의 박원순, 환경운동의 최열 그리고 여성운동의 한명숙 등 중앙형 운동에서는 어지간하면 이름은 알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배출했다. 1세대 지도자였던 박원순과 최열은 동반자적 관계이면서 약간의 라이벌 의식도 있는 사..
보궐선거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석연 변호사의 갑작스러운 사퇴는 아마 1주일만 지나면 뉴스거리도 되지 않고, 그는 잊혀진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와중에 그가 박원순 후보에게 토론을 요청하고, 나경원이 아니라 시민후보로서 박원순과 단일화하겠다는 제안은 그냥 해프닝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게 볼 일은 아니다. 보수 쪽에서 이석연은 그냥 행정수도 이전의 위헌 소송을 제기한 율사 정도로만 알려졌겠지만, 그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경제정의실천연합, 흔히 경실련이라고 부르는 곳의 사무총장이었다. 박원순이 한참 참여연대 사무총장을 할 때는, 그만큼 유서깊고 중요한 단체의 실무 책임자였다. 일단 나는, 마음이 애틋해졌다. 그가 박원순에게, 나는 나경원이 아니라 당신과 단일화할 수 있어, ..
지난주에는 특히 많은 일이 있었다. 박원순의 서울시장 출마가 어느 정도 기정 사실이 되었고, 민주당에서도 경선이 본격 시작되었다. 대중적인 주목을 못 받았을지 몰라도 ‘노심’이라고 한동안 불리던 노회찬과 심상정이 진보신당을 탈당하였다. 1992년 이후 진보정치추진위원회 시절부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했던 그 본 그룹에는 최대의 위기가 온 것이다. 그리고 흔히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보수적 시민단체의 추대라는 형식으로 이석연 변호사가 출마를 하였다. 이런 급변하는 상황을 놓고 호사가들 사이에서 아주 말이 많았다. 박원순이 출마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박원순이 누구야,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시민단체 내부에서의 박원순에 대한 인지도와 일반인들의 인지도에는 차이가 많다. 반면 이석연 출마 선언 때에 사람..
2006년 지방선거 몇 년 전에 시민단체 내에서 서울시민포럼이라는 단체를 결성해서 서울의 지자체 선거를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박원순 대표였는데, 그가 출마하는 데까지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그해 서울시장 선거는 결국 강금실과 오세훈의 양파전으로 갔고, 여성단체는 강금실을, 그리고 환경단체는 음으로 양으로 오세훈을 도왔다. 환경단체는 1992년 리우에서 벌어진 환경 정상회담에서 생겨난 ‘의제21’을 중심으로 지자체와의 협력 구조가 생겨났는데, 고건 서울시장 때 이후로 서울시와는 일정한 협력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오세훈 서울시장의 초대 인수위원장을 최열 대표가 맡기도 하였다. 환경운동연합이 지자체와 여러 가지 양상으로 협조도 하고 갈등도 빚게 되는 반면, 참여연대..
시민단체가 한국에서 그 힘이 절정기에 올랐던 것은 아무래도 2000년 낙선운동 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시민단체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런 현실적 실력 행사가 배경이 된다. 남 잘 되는 건 못해줘도 고춧가루는 뿌릴 수 있다, 그런 게 낙선운동이 가진 메커니즘이다. 좀 치사해보이기는 해도 시민적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물론 현실화하기에도 가장 강력하다. 노무현 정권을 지나면서 시민단체가 사실상 집권 세력이니까 힘이 세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권력이라는 게 불가근 불가원의 속성이 있어서 너무 가까우면 단체의 운동은 좋아지지는 않는 경우가 생긴다. 실제로 환경단체 등 시민운동의 위기에 대해서 지적이 있고 공개적인 토론회가 열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