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이 초당 몇 권씩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눈앞에서 이 사실을 목도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어떤 열망’을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느낌은 단순한 인상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감히 단언하건대, 이 ‘어떤 열망’은 기성정치로 불리는 정당정치와 정치인 집단에 대한 혐오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철수 현상’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개탄할 것이 아니라, 매진 사례를 속출시키고 있는 이 열망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와 그 바깥의 정치에 대한 희망이 안철수라는 하나의 기표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상황은 19대 총선에서 나타난 진보정당에 대한 미약한 지지율과 무관하지 않은 것..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어떤 자양강장제 광고에 나오는 장면. 포장마차에서 직장인 둘이 소주를 마신다. 사표를 내겠다고 한 남자가 큰소리를 치고 친구가 그를 말린다. 갑자기 이 장면은 텔레비전 속에 담기고 이를 지켜보던 취업준비생은 “취직을 해야 사표를 쓰지”라며 부러워한다. 역지사지해보면 우리 모두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교훈을 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드디어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출마선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1970년대 경제 발전의 장소 중 하나였던 타임스퀘어에서 출마선언을 하면서 박 전 위원장이 내건 구호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였다. 굳이 1970년대를 상징하는 장소에서 출마..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방한한 슬로베니아 철학자 지젝과 함께 비무장지대(DMZ)를 갔다. 그곳에서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은 분단 상황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의 현장이었다. 평소 주장해온 역설의 장면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흥미로워했다. 한국에서 북한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보기 위해 그는 기념품점에서 북한 상품을 찾았다. 기념품점에 진열되어 있는 북한 상품은 주로 술이었는데, 그 중에 약간 포장이 다른 것이 있었다. 눈썰미가 보통 아닌 지젝은 바로 그 술의 정체를 물었다.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보니, 탈북자들이 제조한 술이었다. 지젝은 파안대소하면서 “변절자들이 만든 술이군”하고 농담을 했다. 순간 얼마 전에 논란이 되었던 임수경 의원의 발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산..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왜 ‘색깔 논쟁’은 돌아온 것인가? 오래전 파묻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좀비가 귀환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 좀비의 귀환은 ‘여의도 극장’에서 상영되는 철 지난 영화일 뿐이다.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촉발된 ‘색깔 논쟁’은 겉으로 심각하게 보이지만, 조금만 속내를 들춰보면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색깔 논쟁’은 정당정치의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불려나온 오래된 마법의 주문이다. 냉전 이데올로기는 한국 자본주의의 형성과 관련해서 ‘국민’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였다. 박정희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자본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정치를 추방하도록 만든 것이 냉전 이데올로기였다. 북한이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적 위협이었기 때문에 이런 의도는 훌륭하게 작동할 수 있었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고객님, 신제품 할인행사가 있으세요.” 요즘 익숙하게 듣는 ‘이상한’ 경어체이다. 고객과 구매할 상품을 동시에 존대하는 이런 말투를 들으면 야릇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문법 파괴를 개탄하는 소리를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는데, 이 문제를 그냥 ‘개념 없는 젊은 세대’ 탓으로 치부하고 지나가기에는 개운치 않은 점이 있다. 고객과 상품을 동시에 높이는 경어체야말로 한국 사회의 노동구조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울상 같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고객은 무엇인가? 자본을 소유한 특별한 신분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생산자이자 동시에 소비자들이다. 소비자는 화폐를 사용해서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생산한 상품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셈이다. 화폐의 매개 없..
이택광 | 문화평론가 통합진보당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야권연대를 명분으로 ‘통합’했던 정당이 그 연대의 토대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말만 통합이었지 사실은 동상이몽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쏟아져 나온 진단들을 보면, 오히려 보수언론들이 문제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주사파’의 문제점을 지목하면서 진보주의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전태일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문까지 내놓고 있다. 그런데도 이른바 진보진영은 예의 ‘조·중·동 프레임’을 내세우면서 ‘당권파’에 대한 온정주의적인 태도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 혼란의 와중에도 왜 ‘당권파’..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지난 총선 결과는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는 거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차려준 상도 못 받아먹었다는 민주통합당 뿐만 아니라, 어렵사리 과반의석을 확보한 새누리당도 승리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통합진보당의 의석이 늘어난 것을 가지고 쉽사리 진보의 약진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현 정부에 대한 정치적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고,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넘쳐흘렀지만, 투표율은 54%에 그치고 말았다. 46%에 달하는 유권자들이 ‘침묵’으로 자기 의사표시를 했다. 명사들이 벌인 온갖 투표 독려 캠페인도 의미가 없었다. ‘2002년 어게인’을 꿈꾸었던 이들에게 투표율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킨 투표율이 바로 70.8%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높은 ..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4·11 총선에서 여야가 얻은 성적표를 두고 여러 해석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동안 선거과정을 주의깊게 지켜보았다면 의외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이미 선거 막바지에 야권연대의 과반 의석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징조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착의 원인은 이런 위기의 신호에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한 민주당 지도부에 있을 텐데, 사퇴라는 수순 이외에 뾰족한 수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2002년과 지금을 비교하면서, “그때도 야권이 지리멸렬하다가 막판 뒤집기를 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희망 섞인 위안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총선의 패인 중 하나가 정치공학적인 발상에 안주한 야권연대의 자만이라고 지적되고 있는 마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