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공개됐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이냐, 공공기록물이냐 등 법리 해석을 놓고 따져 묻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초미의 관심사는 새누리당 일각에서 주장해온 것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연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한다는 말을 했는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을 능가하는 ‘폭탄발언’은 없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쇼가 너무 싱겁게 끝났다. 회의록을 아무리 읽어봐도 새누리당이 평소에 제기해온 의혹에 맞는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서상기 의원을 비롯해 새누리당이 의혹을 제기했던 문제의 부분을 보더라도, 당시 김정일은 NLL과 관련해서 실무협상을 진행한 뒤에 “과거에 정해져 있는 것, 그것은 그때 가서 할 문제”라고 밝히고 있다. 두 정상이 NLL ..
베네딕트 앤더슨은 최근 뉴레프트리뷰에 기고한 글에서 동남아국가의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해당 국가 엘리트층의 무관심을 꼽았다. 서양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자국의 문학작품을 읽지 않아서 ‘민족작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이런 앤더슨의 말은 다른 감각의 훈련이 필요한 근대문학의 독자로서 엘리트층이 일정하게 계몽의 역할을 수행했어야 한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한국은 유별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앤더슨의 지적이 옳다면, 한국의 경우는 자국의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들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제기해야 할 질문은 ‘한국문학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일 테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엘리..
일베로 대표되는 극우파들이 공개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지칭하면서 1980년 광주 ‘사건’이 유언비어를 통해 촉발된 폭동에 지나지 않았다고 발언하는 중이다. 얼마 전 MBC TV 에 출연한 미디어워치 변희재 대표는 이 사실을 공개 방송에서 인정하면서 광주 ‘사건’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우경화 경향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이 이미 있었다. 정리하자면, 보수정권이 젊은 세대의 현실인식을 우편향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라는 견해와 진보정권의 정책 실패가 정치환멸을 불러일으킨 결과라는 입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와 달리,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광주 ‘사건’의 제도화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 보상은 이와 같은 제도화의 단면을 보여..
황당한 일들이 벌어진 한 주였다. 먼저 윤창중 파문.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수행하고 방미했던 대변인이 성추행으로 전격 경질당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외신은 이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국내 언론과 달리 정부 고위관료가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보다도 한국에 만연한 성차별 의식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사들이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적한 ‘유리천장’으로 인해 한국 여성이 적절한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사건을 윤창중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키려는 경향과 이런 외신의 반응은 사뭇 대조적인 것이다. 문제적인 것은 윤 전 대변인의 기자회견이었다. 그는 성추행 사실을 부인하면서 피해 여성에게 잘하라는 격려의 의미에서 “허리를 툭 쳤을 뿐”인데, “문화 차이”로 인해 오해를 빚게 되어 유..
정치인과 연예인은 여러 측면에서 서로 닮았다. 한때 ‘폴리테이너’라는 말도 있었지만, 연예인이 정치적 발언을 하거나 정치인이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것도 이제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일상생활과 정치의 관계가 은연중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런 분위기가 썩 나쁜 것은 아니다. 물론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닐 테다.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정치인과 연예인은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둘의 역할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중예술가’로서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감각을 관리하는 존재이다. 감각을 관리한다는 의미는 규범을 확인하고 강화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연예인은 이런 역할에 충실하다.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아무리 싸이의 ‘젠틀맨..
‘가왕’ 조용필의 ‘바운스’가 싸이의 ‘젠틀맨’을 제치고 한국 음원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흥미로운 것은 기존 팬들은 물론이고, 젊은 세대까지도 그의 신곡에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의 의미를 아는 이들이라면 이런 현상이 그렇게 색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누구인가? 거의 모든 음악 장르를 소화해낼 수 있다고 해서 ‘가왕’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가요계의 어른’이 아닌가? 그런데 실상이 이렇기 때문에 이번 현상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운스’에 대한 찬사가 아이돌 스타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의견들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이 곡이 표현하고 있는 ‘젊은 감각’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사랑의 설렘을 경쾌하게 노래했다는 점에서 이 노..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꾸준하게 한국 정치와 관련한 논의를 펼쳐온 영국의 정치학자 케빈 그레이는 영국에서 발간되는 ‘뉴레프트 리뷰’에 기고한 한국 대선 관련 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1987년에 발생했던 수동적 혁명을 진척시킬 완벽한 형상”으로 호출되었다고 진단했다. ‘87년 체제’의 교착상황을 풀기 위한 보수의 약진이 박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망은 그렇게 밝지 않다는 결론이다.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박 대통령의 정부는 난항에 봉착해 있다는 판단을 그레이의 논의에서 읽을 수가 있다. 그레이의 진단이 얼마나 옳은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실제로 한 달 동안 전개된 상황만을 놓고 보면 우려의 시선을 거두기 어렵다. 당과 정부와 청와대가 따로 노는 모습은 리더십 부재라는 말 이외..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안철수 전 교수가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하면서 귀국했다. 북한의 전쟁위협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무색하게 국민의 시선은 그의 귀국 일정에 쏠렸다. 그만큼 그의 귀국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왜 보궐선거에 출마하는지 모른다고 말할 이들은 없을 테다. 귀국의 명분은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집중된 관심에 대해 과연 안 전 교수가 적절하게 화답했던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귀국 당시 공항에서 이루어진 회견은 솔직히 이런 문제의식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당창당과 관련한 질문에서 그는 “일단 당선이 된 뒤에 고민하겠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즉답을 회피하는 인상이 되풀이된 것이다. 안 전 교수의 귀국이 의미를 가진다면 바로 야권 정계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