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이루어진 첫 대국민담화는 지금 현재 처해 있는 한국 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분노의 담화문’에 담긴 내용은 협조하지 않는 야당에 대한 질타로 채워졌다. 답답한 대통령의 심정에 일말 동정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야 협상’이라는 과정에 대해 싸잡아 ‘발목잡기’라고 판단해버린 일도양단은 성급했다는 생각이다. 교과서에서 배우기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요체는 행정, 사법, 의회라는 삼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이다. 한국 사회는 경위야 어떻든 영미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고, 독재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정치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국민을 대의하는 의회와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한 대통령이 ..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영화 시사회를 봤다. 감독이 현장에 있지 않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원격으로 촬영 지휘를 해서 만든 ‘실험 영화’였다. 이런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 영화만 놓고 이야기한다면, 세 가지 정도로 영화라는 예술장르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컴퓨터그래픽 영화의 등장 이후에 망각되었던 감독의 지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매끈한 인공의 형식을 만들어내기 위한 거친 노동의 현실, 그리고 감독의 입장에서 ‘컷’이라고 외치는 순간 필연적으로 카메라에 담긴 것보다 더 나은 장면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실패의 기록이 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원래 이라는 단편 제작의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는 제목 그대로 배우와 스태프들이 내뱉는 생생한 ‘뒷담화’를 담고 ..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류승완 감독의 이 관심을 끌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 할리우드 스파이 영화를 흉내 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스파이 영화 장르의 특성보다도 액션 영화 장르의 특성이 더 강하다는 이런저런 평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가 ‘국가’와 ‘개인’을 대립시키는 할리우드의 장르법칙을 남북대치라는 소재로 버무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 변화일까? 과거에 남북문제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은 대체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서 개인을 다루고 있지만, 은 이런 익숙한 설정을 폐기하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있던 자리에 ‘국가’가 들어선 것이다. 사소한 변화일 수도 있지만, 블록버스터 영화가 가장 민감하게 대중의 변화를 읽어내는 장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애써 옹호해 주던 이들을 무색하게 만든 인사청문회였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말이다. 익숙한 풍경이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에 다시 등장했다. 지난 선거에서 변화와 쇄신을 최대 화두로 삼았던 정치인들의 다짐이 뇌리에서 사라지기도 전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야심차게 과거를 털고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차기 정부에 심각한 이미지 손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새로운 정부는 출범하기도 전에 과거 5년 동안 불통의 이미지를 남겼던 이명박 정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게다가 이 후보자의 인선은 대통령과 당선인의 공조를 화기애애하게 내세웠던 첫 번째 ‘업적’이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보수언론까지 나서서 이 ..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문재인 후보와 이정희 후보에 대한 시인 김지하의 발언이 화제다. 거의 ‘막말’ 수준이라는 평가다. 의 ‘막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보수언론이 김지하의 표현을 여과 없이 내보낸 것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나에게 김지하의 ‘막말’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민청학련 무죄 판결에 대한 인터뷰에서 나왔던 “돈이나 많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경우에 따라서 이 말은 최근 김지하의 행보를 설명해주는 근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김지하가 ‘돈 때문에’ 박근혜 당선인을 옹호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약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표현수위는 높았지만, 그의 인터뷰에 등장한 여러 문제의식들은 비슷한 연령대의 ‘어른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18대 대선은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종결되었다. 결과를 놓고 여러 말들이 오갔지만, 문제는 민주당의 전략 부재였다. 유권자들은 냉정한 투표를 했다는 생각이다. 강고한 지역구도와 인구비율을 언급하면서 패배의 필연성을 강변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핑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민주당의 행태는 흡사 시험출제 경향이 바뀌었음에도 낡은 참고서를 고집하는 수험생처럼 보였다. 당연히 시험 성적이 좋게 나올 수 없었다. 유권자들은 차후에 닥쳐올 다양한 위기들을 고민하면서 가장 좋은 대책이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판단했는데, 민주당만 ‘정의’라는 윤리적 가치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깨어있는 시민’이라면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분노해 민주당을 찍을 수밖에 없다는 오만이 짙게 ..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어차피 완벽히는 할 수 없으니 요만큼만/ 뻥튀기는 하지 말자 그냥 나의 몸집대로/ 아는 만큼만 말하고 모르는 건 배우면 되지.” 가수 오지은의 ‘인생론’이라는 노래의 첫머리다. 요즘 20~30대의 감수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이 노래에 담겨 있다. 물론 이 노래가 보여주는 ‘인생론’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현실은 꿈꾸는 것과 다르다고 ‘어른들’은 훈계를 할 것이다. 물론 이들이 이런 훈계의 내용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지은이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순진하게 꿈만을 담아 노래로 만들었을 리도 만무하다. 오히려 이들은 현실을 너무 잘 알기에 이런 노래를 ‘홍대 앞’에서 즐겨 부르는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기묘한 대선이다. 전선은 형성되지 않고 지지자들은 우왕좌왕이다. 이명박 정부를 실패로 규정하는 광범위한 불만이 합의되어 있음에도 새누리당이 이슈를 선점하고 주도하는 진기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박근혜 후보를 ‘유신 잔당’으로 몰아가려 했던 문재인 후보 측의 선거 전략도 잘 먹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박정희 대 노무현’의 프레임은 참여정부의 공과 문제로 번져서 문 후보의 발목을 잡는 형국이다. 단일화 과정에서 안철수 전 후보가 사퇴하긴 했지만, 그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문 후보가 부동층의 지지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말을 아낄수록 주변의 관심을 더 끌었던 출마선언 이전의 효과를 안 전 후보는 다시 누리고 있다. 무대에서 내려갔다고 해서 역할이 끝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