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의 첫 장면. 202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폐허가 된 놀이터가 보인다. 아이들이 타고 놀던 미끄럼틀이나 세발자전거는 잔혹하게 일그러져 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화면 밖에서 씨익 웃으며, 폐허의 놀이터에서 공허하게 흔들리는 철제 시소의 마찰음을 들려준다. 곧이어 기계 병사가 인간의 해골을 짓밟으며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다. 2029년이 영화의 배경이다. 고작 13년밖에 남지 않았다. 화성 탐사용 기계인간의 복수가 펼쳐지는 영화 는 2019년이 시간적 배경이다, 3년 남았다. 우주선을 통제하는 슈퍼 컴퓨터가 반란을 일으키는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는 2001년, 벌써 과거가 되었다. 모든 뛰어난 작품이 그렇듯이, 예술은 (김훈)처럼 과거를 다루든 (코맥 매카시)처럼 근미래를 다루든, 지금 이 순간, 오..
도스토예프스키의 은 처참하면서도 웅혼한 기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출신 좋은 사람이 갑자기 외부적인 상황에 의해 특권을 상실하고 민중들과 더불어 생활을 하는 변화가 주어졌을 때에만 ‘완벽히’ 지각할 수 있다.”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삶에 대하여, 고통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말이다. 지식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인의 모습’으로 우호적으로 지낼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합치될 수 없는데, 다만 ‘더불어’ 생활하는 길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나는 책이나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것을 확신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쓴다. 다름 아닌 시베리아 유형지라는 ‘현실’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날카로운 통찰과 비범한 유머로 ‘죽음의 집’의 일상을 통해 삶의 본질을 들여다본다. 작..
아, 한라산에 가고 싶다, 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결혼 20년차에 들어서 아내의 얼굴을 감히 정면으로 마주 본다는 것은,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기억상실 장치로 날카로운 복수가 펼쳐지는 드라마를 보면서 아내가 시큰둥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처절한 복수극 의 대사와 ‘아, 한라산에 가고 싶다’는 말이 기묘하게 겹쳐지면서, 나는 한번은 가긴 가야 되겠구나, 다짐했다. 깊은 산 암자에서 수행하는 고승을 몇 번이고 찾아가 한 말씀이라도 얻어들으려는 어리석은 중생처럼, 그 아득한 산정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 말 한마디, 나는 정녕 듣고 싶다. 몇 번 듣기는 하였으되, 그것은 썩 진솔하지 않아 보였다. 연거푸 고산 등정을 한 사람들은 ‘인내’ ‘동료..
“은퇴하겠다고 발표를 했지만 막막하더라고요. 구단에 유니폼을 반납하고 나오는데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어느 무명 선수의 절박함인가. 그렇지 않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2010년 9월 은퇴한 양준혁 선수의 말이다. 작년 8월, 어느 방송에서 양준혁은 이렇게 덧붙였다. “맨날 야구장에 가고 그랬는데, 이젠 뭘 해야 되는지 막막하고 계속 쉬어야 되는데 어떻게 쉬냐 이 말이죠.” 양준혁 선수의 이 말은 실제로 먹고살기 막막하다기보다는 더 이상 현역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된 노장 선수의 회한에 가깝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넉넉한 연봉을 받았고 본인의 의지에 따라 야구와 관련된 여러 직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은 된다. 그럼에도 말 못할 답답함과 회한에 사무치는데 여느 선수들이라면, 무명 선수라면 이 감정..
스포츠계에서 ‘서말구’란 이름과 ‘10초34’란 기록처럼 익숙한 단어도 드물 것이다. 한데 썩 긍정적인 느낌은 아니다. ‘10초34’라는 숫자는 심하게 말하면 육상 발전의 발목을 부여잡는 ‘저주의 숫자’이자 반드시 깨야 할 ‘비원(悲願)의 기록’쯤으로 여겨졌다. 서 선수가 1979년 멕시코 유니버시아드에서 세운 육상 100m 기록인 10초34가 무려 31년간이나 깨지지 않았으니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한국기록 보유자는 따로 있었다. 1966년 정기선 선수가 세운 10초3이었다. 서 선수도 타이기록(10초3)만 갖고 있을 뿐 정기선의 기록을 끝내 깨지는 못했다. 궁금증이 생긴다. 왜 서말구 선수의 유니버시아드 기록(10초34)이 0.04초 모자란데도 한국기록으로 공인됐을까. 당시 세계육상계가 도..
“눈만 내놓고 청테이프로 다 감았어요. ” 지난 9월 말, 대구의 한 고등학교 운동부에서 벌어진 폭행의 일단이다. 1학년생 6명은 선배들로부터 6개월이 넘도록 폭행을 당했다. 마치 벌레를 데리고 유희를 즐기는 듯한 일도 있었다. ‘가위 바위 보’를 시켜 진 사람에게 에어스프레이파스나 소독용 알코올을 항문 등에 뿌리기도 했다. 이토록 섬뜩한 치욕은 평생 따라다니는 트라우마가 된다. 대구시교육청이 이 사건을 계기로 관내 모든 학교 운동부의 폭력 실태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섰다. 상담 인력 확충, 기숙사 폐쇄회로(CC)TV 교체, 비상벨 설치 등의 조치도 발표했다. 그러나 누적된 폐습이요 고질적인 병폐가 이런 정도로 폭력이 근절되기는 어렵다. 지난 8월 말의 사건을 보자. 전남의 한 중학교 운동부 코치가 여중생..
도시재생이란 말이 있다. 도시의 폐허들, 낙후해 외면당한 공간들을 문화적 관점에서 보존하고 재생하려는 노력이다. 인구, 교통, 교육, 복지 등의 현황을 최대한 분석하되 그 이상의 무엇, 즉 왜 사람들은 그곳을 회피하거나 사랑하는가를 문화적으로 분석한다. 기존의 도시개발 관점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 그러나 틀림없이 존재하는 그 장소의 역사성과 문화성 그리고 미묘한 삶의 질서가 문화적 안목으로 해명되고 그 해법도 모색된다. 건축가 승효상과 미술가 임옥상이 주도하는 서울 창신동의 소통공작소가 대표적이다. 뉴타운 지구 해제 이후 이 일대를 어떻게 삶의 장소로 재생할 것인가, 그 관점과 실천이 집약된 곳이다. 그 밖에 성북문화재단과 스페이스 오뉴월이 공동 추진한 ‘미아리고개 재생 프로젝트’, 예술가들이 허름한 ..
네덜란드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68)는 스포츠의 상식을 초월한 인물이다. 하루 80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체인스모커였다. 경기 중 전반전이 끝날 때를 기다려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훈련도 빼먹기 일쑤였다. 시건방도 무진장 떨었다. 줄담배를 피워대고 훈련에 관심도 없으면서 “축구는 몸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게으른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월드컵 축구를 시청하느냐는 질문에 “없다. 날 TV 앞에 앉혀놓을 유능한 선수가 없으니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슈퍼스타의 상징인 9번이나 10번 대신 14번을 단 이유를 두고도 “9번은 디 스테파노, 10번은 펠레가 이미 달았으니 헷갈릴까봐”라며 으쓱댔다. 그의 자부심대로 그의 이름은 디 스테파노-펠레-크루이프-마라도나로 이어지는 레전드 계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