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미국 월드컵 자료를 찾다가 ‘경우의 수’를 따진 기사를 검색했다. 스페인(2무)·볼리비아(1무1패)와 비겼던 한국(2무)이 독일(1승1무)과의 예선 최종전을 앞둔 시점이었다. 기사는 독일과의 전력차는 아랑곳없이 갖가지 경우의 수를 제시하다 ‘일장춘몽’으로 끝을 맺는다. “독일이 혹 16강전에서 쉬운 상대를 고르려고 일부러 한국과 비겨서 조 2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즉 독일이 조 2위가 되면 비교적 쉬운 나라들로 구성된 A조 2위(루마니아·미국·스위스 등)와 16강에서 만날 수 있기에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독일은 헛된 기대와 달리 한국을 3-2로 제치고 조 1위를 차지했다. 기자의 이름을 보니 ‘이기환 기자’였다.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단언컨대’ 21년 전에는 ..
단연 김성근이었다. 올해 프로야구의 흥행과 집요한 관심의 주인공은 김성근 감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프로야구, 특히 ‘마리한화’의 경기를 흡사 집안일처럼 지켜보았는데, 그 결정적인 증인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오랫동안 축구 순혈주의자를 자처하며 축구 선수들의 추락과 상승에 감정을 이입하며 살아왔는데, 올해는 그 마음의 상당 부분을 덜어서 프로야구에, 특히 한화이글스에, 무엇보다 김성근 감독에게 몰입하고야 말았다. 올해 나의 밤은 한화의 야구와 함께 뜨거웠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화는, 경기 중반에 그 흐름과 승패가 일찌감치 결정나버리곤 했다. 대여섯 점 차이로 끌려갈 경우 선수들이 지레 포기하고는 서둘러 더그아웃을 떠나려 했다. 하룻저녁의 승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목청껏 응원하는 팬들이 오히려 더 열..
1989년 이후 다시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성근 감독 때문이지만, 연고도 관련도 없는 한화 이글스의 팬이 된 것은 불꽃 남자 권혁 때문이다. 리더십 관련 서적을 찾아 읽다 김성근 감독이 쓴 세 권의 책을 읽고, 그의 리더로서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한화 이글스 경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주한 권혁의 뒷모습.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마지막 책임을 져야 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었을 것이다. 어느새 권혁의, 이글스의 팬이 된다. 일터에서 힘들 때 그의 마지막 투구를 생각한다. 어느 날은 승리의 공이었고 어느 날은 패배의 공이었던 그의 마지막 투구와 그 공을 던진 그의 어깨와 부황 자국이 남아 있는 그의 등을 생각한다. 야구..
“루마니아가 세계 7위라고? 미스터리이자 웃음거리다.”(가디언) “이건 조크다. 무시해야 한다.”(USA투데이) 국제축구연맹(FIFA)이 이번 달 국가별 세계랭킹을 발표하자 온갖 비아냥이 쏟아졌다. 오죽했으면 루마니아의 앙헬 이오르다네스쿠 감독마저 “우리 팀은 세계 7위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했을까. 사실 최근 11년 동안 루마니아의 축구 수준은 형편없었다. 랭킹 산정기준은 이렇다. 최근 4년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승무패×경기중요도×상대팀전력×대륙 간 전력’에다 최근 경기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승(3점) 무(1점) 패(0점)’, ‘월드컵(4점) 대륙컵(3점) 월드컵 예선 등(2.5점) 친선(1점)’ 등이 부여되는 식이다. 상대팀 전력에 따른 점수도 차이가 있다. 200점(최대..
부산에 동아대학교가 있다. 여러 학과에 걸쳐 두루 실력을 인정받아 온 대학이지만 특히 체육과 관련해 전국적 차원의 실력과 지명도를 가진 대학이다. 그런데 바로 그 대학의 운동장이 주차장으로 급변했다. 학교 측은 서구 구덕캠퍼스에 있던 예술대가 승학캠퍼스로 옮기면서 주차난이 심각해져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고 다른 곳에 같은 규모의 인조잔디 운동장을 새로 조성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라고 답했다. 별일 아닌 듯 말하고 있지만, 실로 중요한, 단지 대학 체육의 위기만이 아니라 대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게 만드는 중차대한 문제다. 이런 일이 여러 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연세대 신촌캠퍼스의 실외 농구장은 신축되는 아트홀 때문에 철거됐다. 농구장에서 발생하는 소음 때문에 악기 조율..
우사인 볼트(자메이카·29)는 이름 그대로 ‘번개’라 할 수 있다. 번쩍하는 사이에 100m(9초58)와 200m(19초19)를 한달음에 달려버린다. 196㎝, 95㎏의 탄탄한 몸으로 무장, 다른 선수들이 44걸음에 내달리는 100m를 41걸음으로 끝내 버린다. 최대 보폭은 243㎝나 되며 평균시속은 37.6㎞에 이른다. 60m부터 시작되는 가속구간의 순간최고속도는 시속 45㎞에 달한다. 영국 브루넬대의 크레이그 샤프 교수는 “볼트가 아킬레스건을 활용해 짧은 접지시간에 더 강하게 지면을 차버림으로써 가속을 얻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분석했다. 그제 베이징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00m 결승에서는 ‘바람보다 빠르다’는 저스틴 게이틀린(미국·33)을 제치고 9초79로 우승을 차지했다. 어찌 바람이 번개를 이길 수..
광복 70주년을 맞아 여러 분야의 70년 역사를 정리하는 일들이 많았다. 나는 지난주 KBS에 가서 광복 70주년 특집의 하나로 한국 스포츠 70년사를 기억하는 데 동참했는데, 방송이라는 특성 때문에 다 못한 얘기가 있어 여기에 몇 자 적는다. 우선,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는 복잡다단한 수많은 요소와 사건들이 당대의 상황이나 구조적인 힘과 맞물리면서 격렬하게 흘러간다. 그중 어느 것을 특별히 선정하고 기억한다는 것은 중립적일 수가 없다. 물론 사건의 측면에서,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이나 88 서울올림픽 등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렇게 선택하다 보면 생략되거나 삭제되는 사건도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해석이다. 모든 사건과 인물을 다 기억할 수 ..
‘빨치산’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니 누군가 ‘빨갱이가 (지리)산에 숨어들었다고 빨치산이라 하는 건가요’라고 묻고 있다. 실소를 자아내지만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1946년 대구 폭동 이후 10년 이상 지리산에 숨어들어 유격전을 펼친 공산 빨치산들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프랑스 발음 ‘빠르티장’(partisan)에서 유래됐으니 공산게릴라만 콕 집어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후방에서 무장인민투쟁으로 침략자들을 무력화시키려고 조직된 부대와 구성원이다. 엄밀히 말해 미국독립전쟁 당시의 민병대와 러시아 내전 때의 적군 및 민중봉기 세력도 빨치산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2차대전 후 유고연방을 세운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전설적인 빨치산이었다. 티토는 80만명의 빨치산을 이끌고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