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역시 우리나라의 스포츠를 주도하는 정념은 국가주의와 가족주의다. 국가주의가 힘차게 펄럭이는 깃발로 드러났다면 가족주의는 섬세하고 끈끈한 힘으로 나타났다. 이 두 가지 감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은 채 소치의 상공을 선회하다가 특정한 국면에 따라 번갈아 등장하기도 하고 한 몸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를테면 김연아 선수를 ‘대한민국의 딸’ 혹은 ‘우리 연아’라고 호명할 때, 국가주의와 가족주의는 한 몸이었다. 대 규모 국가대항전인 올림픽에서 이러한 감정 상태는 비단 우리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차르 푸틴’이 이끌었던 러시아 대표팀의 성과는, 올림픽 기간에 불거진 우크라이나 사태와 맞물리면서, 거대한 ‘유라시아주의’의 전리품이 되었다. 다른 나라 선..
2011년 1월, 박지성이 대표팀 은퇴를 발표했을 때 나는 그 이유와 소신을 지지하는 글을 몇 차례 썼다. 왜 몇 번이나 썼느냐 하면 축구협회 일각에서 ‘너의 몸은 국가의 것’이라거나 ‘그쪽에서 다른 생각이 있나 알아보겠다’는 식의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력한 축구인사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차범근 해설위원이 박지성의 몸 상태와 정신적 고통을 깊이 공감하며 은퇴 의사를 존중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3년이나 지난 지금 박지성은 ‘은퇴 복귀’ 논란의 중심에 있다. 사실 시간이 별로 없다. 6월13일에 브라질 월드컵 개막식이 열린다. 한국팀의 첫 경기는 18일이다. 역산을 해보면 6월2일까지 국제축구연맹(FIFA)에 23명의 최종 엔트리를 제출해야 한다. 30명의 예비 엔트리는 5월13일까지 제출해야 ..
축구는 놀라운 단순성에 의하여 일찌감치 세계화되었다. 우선 장비가 단순하다. 정규 경기가 아닌 이상 공 말고는 장비가 없어도 무방하다. 지금 이 순간 지구 어디선가 공을 차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아마도 고급 축구화나 정강이 보호대 같은 장비 없이 공을 쫓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기후의 장애도 거의 받지 않는다. 추운 곳에서나 더운 곳에서나 공을 찬다. 규칙도 단순하다. 꼬마 아이들도 손으로 공을 건드리면 안된다는 것쯤은 잘 안다. 축구 규칙은 17조에 불과하다. 절반은 축구장 규격이나 선수단 구성 같은 것이다. 나머지도 선수와 심판이 아닌 이상 몰라도 축구를 즐기는 데 어려움이 없다. 일종의 제도와 자유의 모순 관계랄까, 규칙이 많아지면 그만큼 억제되는 측면이 많다. 규칙이 단순하고 그것마저도 심판의 재..
축구협회가 지난 11월22일 비전 선포식을 가졌다. 창립 80주년의 일환으로 지금 선 자리에서 앞으로 지향해야 할 자리를 살핀 행사다. 이를 위해 축구협회 미래기획단이 ‘30대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33년까지 ‘꿈꾸고, 즐기고, 나누며’라는 3대 핵심 가치 아래 경쟁력 강화, 인재 육성, 열린 행정 구현, 축구산업 확대, 새로운 문화 조성 등 5대 추진 목표도 밝혔다. 이러한 비전이나 목표는 실천 의지와 현실성이라는 구체적인 힘이 결여되면 공허한 외침이 되기 쉽다. 일단 의욕적으로 새로 출범한 정몽규 회장 체제와 축구계 안팎에서 신망을 얻고 있는 이용수 미래기획단장이라는 조건에서 보면 이 비전과 목표가 탁상 위의 공론이 될 가능성은 비교적 작다. 그럼에도 몇 가지 짚어보고 싶..
인권 감수성이란 말이 있다.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 행위에서 상당히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인권침해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전혀 의식하지 못할 경우, 해당 개인이나 집단의 인권 감수성은 취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침해 당사자는 대체로 관행이라니 농담이라느니 제도가 불비해서 어쩔 수 없다느니 하는 말을 한다. 스포츠계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최근 여자실업축구(WK리그) 6개 구단 감독들이 서울시청 소속의 박은선 선수에 대해 ‘성별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폭력적 인권침해에 대해 비판 여론이 형성되자 감독들은 ‘농담’이었다고 변명하다가 결국 수원FMC의 이성균 감독, 고양 대교의 유동관 감독이 사퇴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2002년을 빛낸 두 명의 축구 스타가 다시 한번, 오랜만에,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 사람은 누구라도 듣고 싶은 소식으로 전해왔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소동으로 전해왔다. 이영표와 이천수, 두 사람이다. 언제나처럼 영리하고 빠르게 그라운드를 누빌 것 같았던 이영표 선수는 지난 28일, 소속팀 밴쿠버 화이트캡스의 홈구장에 들어섰다. 밴쿠버는 경기 전체를 이영표에게 헌정했다. 티켓은 이영표의 사진으로 인쇄되었고 경기장에는 이영표를 기리는 영상이 흘렀으며 수많은 팬들이 이영표의 유니폼을 입었다. 한편 이영표와 더불어 두 차례의 월드컵을 함께했던 이천수는 우울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폭행 사건이 있었고 경찰의 조사를 받았으며 구단의 중징계까지 내려졌다. ‘아내를 보호하려 했다’는 말..
축구대표팀이 12일과 15일 브라질과 말리를 상대로 평가전을 치른다. 이를 위해 기성용 선수가 입국했다. 그러나 먼저 “최강희 감독님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부터 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했다. “진작 사과를 드렸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를 ‘변명’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볼 때 스물네 살이라면 사랑을 고백하거나 사과를 하는 일의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 독자들 중에는 기성용보다 훨씬 연륜이 있음에도 ‘타이밍’을 놓친 바람에 평생 후회되는 일을 겪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한번 타이밍을 놓치면 그 어떤 묘법을 써도 구차한 변명이 되거나 불필요한 오해만 낳게 된다. 마음은 검게 타들어가도 차라리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을까 하며 차일..
“여러분, 모자를 벗으시오. 저기 천재가 들어오고 있소.” 1832년, 슈만이 동년배 피아니스트인 쇼팽을 독일 음악계에 소개하는 유명한 평론에서 한 말이다. 그 자신이 뛰어난 작곡가이자 영향력 있는 비평가였던 슈만의 단호하면서도 품격 있는 이 말은, 그 후 예술계에서 진실로 격찬할 만한 천재를 널리 알릴 때 재인용되곤 한다. 이는 신예 작가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당대의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벨린스키가 다급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새로운 고골이 탄생했소’라고 외쳤던 사건만큼이나 예술사의 극적인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나도 슈만의 이 열렬한 문장을 슬쩍 옮겨 써본 적 있다. 2005년의 일이다. 예술계의 신예 천재를 향한 격찬은 아니었고, 어느 축구 유망주를 위해서였다. 박주영이 그 주인공이다. 고교 시절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