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지네딘 지단이 수원에 왔다.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한국과 프랑스가 평가전을 치른 것이다. 그날 지단은 지쳐 있었다. 더욱이 맞상대는 김남일. 이 진공청소기는 지단의 기운을 다 빨아들였다. 지단은 제 뜻을 다 펴보지 못하고 벤치를 향해 교체 사인을 보냈다. 다음 날, 대개의 스포츠 기사들은 지단이 교체된 것을 두고 세 가지 정도의 추측성 기사를 내보냈다. 노쇠했다는 추측이 첫 번째였다. 그러나 그는 2002는 물론 2006월드컵까지 치렀다. 고액 연봉을 받는 스타가 평가전을 우습게 여겼다는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표팀으로서는 마지막 평가전이었다. 지단 같은 선수가 이를 가벼이 여겼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유럽 리그가 너무 늦게 끝나서 컨디션을 회복할 여유가 없었다는..
지난 28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 한국 측 응원단이 펼친 대형 현수막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들은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가 그려진 현수막도 내걸었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비판한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이에 “극도로 유감”이라며 “국제축구연맹(FIFA) 규약에 근거해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말해 자칫 국가 간 갈등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의사 표현은 스포츠 정신보다 앞선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이런 사건들은 한국적 국가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국제 경기에서 메달을 따면 군대를 면제해주고 연금을 지급해 특정 선수의 스포츠 실적을 국가 위신을 높이는 위업으로 간주해왔다. 지..
이른바 ‘홍명보의 아이들’이 대표팀에 발탁됐다. 지난 11일 홍명보 대표팀 감독이 동아시안컵 대회 참가 명단을 발표하자 언론이 일제히 표현한 문구다. 그래서 따옴표를 쳐봤다. ‘홍명보의 아이들’ 말이다. 어떤 언론은 ‘대거 발탁’이라고도 썼다. 런던올림픽 참가를 기준으로 보면 정확히 7명이다. 최종 엔트리 23명 중 7명이면 ‘대거 발탁’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조금 범위를 넓혀 홍 감독이 올림픽 팀을 맡았을 때 합류했던 선수들을 더해보면 15명이다. 이 정도면 ‘대거 발탁’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맥락을 보면 반드시 ‘홍명보의 아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홍 감독은 “예비 40명 중 브라질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판단되는 선수들 위주로 선발했다”고 말했다. 행간의 의미는 분명하다..
결국 ‘2년 계약’으로 결론이 났다. 새로 축구대표팀을 맡게 된 홍명보 감독 얘기다. 지난주에 이미 허정무 부회장은 홍 감독과 ‘교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아마도 ‘밀당’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의미 있는 밀당 말이다. 차기 감독의 ‘임기 보장’은 중요한 지렛대다. 히딩크 이후로 수많은 감독들이 선수 파악과 전술 운영을 몇 차례 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홍 감독으로서는 브라질월드컵으로 끝나는 단기 계약이 아니라 최소 3년 이상의 임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자리 욕심이 아니라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밀당’이다. 2010 남아공 이전의 역사는 거론할 필요도 없이 전임 조광래, 최강희 두 감독의 경우만 봐도 ‘임기 보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
지금 이탈리아 축구는 홍역을 앓고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유럽의 축구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자전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도 세계적인 스타들은 반드시 이탈리아를 최종 목적지로 삼았다. 그랬는데, 지금은 경유지 정도로 여긴다. 우선 2006년에 터진 ‘칼치오폴리’, 즉 이탈리아 프로축구 최상위 팀들이 연루된 승부조작, 뇌물, 부패 사건의 후폭풍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역대 최강자인 유벤투스가 하위 리그로 강제 추방당했고 승부조작에 연루된 감독·심판·단장 등이 대거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일부 관계자들의 우발적인 모의가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 특유의 얽히고설킨 ‘유사 가족주의’가 낳은 구조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부 선수는 감독만 바라보고 감독은 비굴한 표정으로 심판을 바라보고 심판..
축구는 영원하고 감독은 경질된다고 하더니 이런 속설을 비범한 경지로 무너뜨린 사람이 있다. 엊그제 마지막 홈 경기를 치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이다. 이 경기는 리그 우승 20회를 자축하는 경기이자 무엇보다 1993년에 맨유 유소년 클럽에 입단하여 20년 넘게 이 팀에서만 공을 찬 폴 스콜스의 은퇴 경기라는 점에서도 각별했다. 퍼거슨은 스콜스에 대해 “가정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조용히 사는 걸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요즘 선수들 중에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선수는 극히 드물다”고 말한 적 있다. 홈구장 올드 트래퍼드는 26년 동안 자신을 영광의 그라운드로 만들어준 노장을 위한 감사의 인사말로 넘쳐났다. 맨유를 후원하는 어느 기업은 ‘투 비 컨티뉴드’라는 문구를 90분 동안 쉬지 않고 내보냈다. 어..
독일 함부르크 SV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의 이적설이 불거지고 있다. 여러 차례 러브콜을 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상위권 팀들을 제치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다. 만약 도르트문트로 이적하게 된다면 그는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그 지역의 유명한 더비(지역 간 라이벌 경기)에도 출전하게 될 것이다. 바로 독일 근대 산업 혁명의 중추가 되는 유서 깊은 루르 지역의 라이벌 도르트문트와 샬케04의 경기다. 일컬어 레비어 더비라고 부른다. 이 레비어 더비의 한 축인 도르트문트는 1909년에 창단되었다. 이 팀은 히틀러 파시즘 때 큰 수난을 겪었다. 각 지역의 유명 클럽들은 히틀러의 광기에 동참해야 했으나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회장은 나치당 입당을 거부했고 이로써 팀은 해체 직전까지 내..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1990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에릭 칸토나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로 유명하다. “갈매기가 고깃배를 따르는 까닭은 정어리가 곧 바다에 빠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같은 말이 그렇다. “생각의 질서를 타파해야 한다. 기존의 틀을 자유롭게 깨버려야 해” 같은 말도 칸토나가 자주 쓰는 말이다. 우리의 스포츠 저널리즘은 감독이나 선수들의 말을 ‘받아쓰기’ 하는 데 반해 유럽에서는 밤 늦도록 날선 토론을 하는 문화라서 이런 발언이 가능한 점도 있다. 아무튼 국내 팬들에게 칸토나는 ‘쿵후 킥’으로 유명하다. 1995년 1월, 그는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는 크리스털팰리스의 팬 매튜 심슨을 ‘응징’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가 쿵후 킥을 날렸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