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의 시 ‘꽃’은 이제 너무나 유명하여 전 국민이 외우는 시가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시를 패러디해서 누군가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가는 꽃이 될까봐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고 우스개로 말하기도 한다. 전 대통령의 이름을 ‘503’으로 대신 지칭하는 식으로 말이다. 김춘수의 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정현종의 시도 생각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어렴풋한 몸짓을 하나의 존재로 확정하는 일이고, 그 존재가 온 우..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8일 대검 검사급 검사 32명에 대한 신규 및 전보 인사를 단행했다. 법무부는 이날 오후 7시30분쯤 전격 인사를 발표했다. 하지만 인사 결정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의견 청취를 놓고 추 장관과 윤 총장 사이에 볼썽사나운 줄다리기가 하루종일 이어졌다. 또한 현 정권을 겨냥한 수사를 주도한 윤 총장의 핵심 측근들이 대거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논란을 예고했다. 검찰 개혁의 충정은 이해하나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인사 내용을 보면 조국 전 법무장관 가족비리와 청와대 하명 의혹수사를 지휘했던 한동훈 대검 반부패강력부장과 박찬호 공공수사부장은 각각 부산고검 차장, 제주지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배성범 서울중앙지검장도 법무연수원 원장으로 물러났다. 강남일 대검 차장, 이원석..
헌법재판소가 8일 최저임금 인상은 기업의 재산권과 기업경영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전국중소기업·중소상공인협회(이하 협회)가 2018년과 2019년 정부의 최저임금 대폭 인상 고시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 사건을 기각 결정한 것이다. 최저임금제의 취지에 부합하는 결정으로, 환영한다. 헌재는 “2018년, 2019년 적용 최저임금은 예년의 최저임금 인상률과 비교해 인상 폭이 큰 측면이 있다”면서도 “입법 형성의 재량 범위를 넘어 명백히 불합리하게 설정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또 “열악한 상황에 처한 사업자들은 그 부담 정도가 상당히 크겠지만, 최저임금 고시로 달성하려는 공익은 저임금 근로자들의 임금에 일부나마 안정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만 18세도 선거권을 갖게 됐다. 교육부가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을 통해 집계한 결과를 보면 오는 4월16일 총선에 투표할 수 있는 학생 유권자는 14만명이다. 서울만 놓고 보면 2만3000명가량이 투표권을 갖게 된다. 많게는 2000표에 달하는 고등학생 유권자가 있는 자치구도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20대 총선에서 관악구을의 1·2위 간 표 차이는 861표였다. 학생 유권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다는 얘기다.선거 주목도에서는 대선이나 총선에 미치지 못해도 학생 유권자의 ‘활약’이 더 기대되는 선거는 바로 지방선거다. 초박빙 승부가 많은 지방선거에선 수백 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사례가 흔하다. 고3 학생 유권자가 꼭 교육 문제만 보고 투표하지는 않겠지만, 본인들이 현실에서 체감하는 학..
한 달 전,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이굴기의 꽃산 꽃글’이 소식을 전했다. 서울 서촌에 자리한 길담서원이 충청도 공주로 옮겨간단다. 길담의 인터넷카페에 들어가니, 책방의 책을 할인판매한다는 글이 올라 있다. 공주 이전을 앞두고 정리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주말 길담서원을 찾았다.오후 늦은 시간, 길담서원 카페에 10여명이 둘러앉아 ‘ 읽기’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 읽기’는 지난해 4월부터 경제학자 강신준 교수의 주도로 매달 한 번씩 마르크스의 을 발췌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어가는 모임이다. 길담의 공부모임은 대체로 회원들이 텍스트를 자율적으로 선정해 진행한다. 과학책을 읽는 ‘시민과학공부 모임’, 경제를 공부하는 모임, 인문학 독서모임 등이 그런 부류다. 그러나 이나 처럼 전문가의 지도로 ..
온천 사우나 시설이 좋기로 소문난 동네다. 하지만 산골 누옥이라도 욕실이 일단 잘돼 있고, 같이 사우나 갈 친구도 없어 온천을 소 닭 보듯 하고 산다. 아부지 생일이라며 아들이 백만년 만에 찾아왔다. 얼치기 실력으로 미역국을 끓이더니 둘이 온천에도 가잔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홀딱 벗고 노천탕에 앉아 비 구경을 했다. 장성한 아이랑 간만에 행복한 순간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멸치국수에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아이에게 옛날 목욕탕 이야길 해줬더니 배를 쥐고 웃는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서로 부탁하여 등의 때를 밀곤 했던 기억들을 들려주었다. ‘때밀이 세신사’에게 맡기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냔다. 돈을 아끼는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사람 사이 정이 많았던 시절. 모두가 때밀이가 되어..
문중원씨는 경마장에서 말을 타는 기수였다. 2019년 11월29일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의 선물을 받았다. 문중원씨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택배로 장난감 화장대세트와 레고를 주문했고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하늘에서도 가족을 위해 달렸다.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문했던 손과 세상에 대한 마지막 주문을 글로 남겼던 손. 행복과 절망의 양손 사이 어딘가 그가 살고 싶었던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 손을 잡지 못해 미안하고 미안하다.유서에는 마사회 놈들을 믿을 수가 없어 복사본을 남긴다고 적혀 있었다. 마사회는 경마라는 합법적인 도박을 설계하는 일을 한다. 우선 판 위에 말을 깐다. 마리당 수억원 하는 말을 ..
지난해 7월 유럽을 강타한 열파(heat wave)는 프랑스에서 46.1도, 독일 42.6도, 벨기에에서 40.2도 등 관측 이래 최고 기온을 모두 경신하게 했다. 특히 이 열파 기간 중 불과 5일 동안 그린란드에서는 550억t의 얼음이 녹았고, 8월1일 하루에만 130억t의 얼음이 녹았다. 130억t, 이는 사람의 평균 몸무게가 62㎏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2100억명의 몸무게 합과 맞먹는다. 현재 세계인구가 약 77억명인 것을 감안하면, 전 세계 인구 몸무게 총합의 27.3배만큼의 얼음이 8월1일 하루에 그린란드에서 녹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극단적인 폭염, 산불, 혹한, 태풍, 허리케인 등 심각한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자연재해 등이 인류와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