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은 맥락이 필요한 문제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먼저 발표했다면, 타인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일까? 어떤 지식도 사회의 자장 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페미니즘도 마르크스주의도 시작은 자유주의였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 언어로 연결된 문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2015년, 신경숙의 표절 논란 즈음 나는 관련 글을 썼다가 장정일로부터 비판받은 바 있다(한겨레, 2015년 9월3일자 인터넷판). 그는 “당신(나)이 쓴 글 중에서 순수한 당신만의 생각이 얼마나 되는가”를 질문하면서, “영향과 모방은 물론 패스티시·인용·비유·패러디가 혼재된 문학 자체에 대한 논의 없는 표절 논쟁”은 문제라는 것이다. 전후 사정을 살펴볼 때 ‘진짜 표절’도 없지는..
선사시대 사람들은 환한 대낮에 태양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식을 경험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개기일식은 같은 지역에서 약 370년에 한 번씩 발생한다고 하는데, 사람이 살면서 일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현상인 일식이 그들에게 주는 공포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나 급격한 기온 하강은 어땠을까? 아마 불편하기는 해도 일식보다는 충격의 강도가 훨씬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때와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일식은 발생 지역과 시작 시각, 종료 시각까지 정확한 예측이 가능한 반면,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여겨졌던 날씨 예측은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수학적인 해답 찾기에 있다. 태양계 행성의 운동은 방정식으로 표현하여,..
드라마에 나오는 권력자들은 날선 호통 한마디로 아랫사람을 어찌할 줄 모르게 만드는 능력을 보인다. 극적 설정을 위한 것이겠지만, 격한 감정이 실린 지적을 수시로 내리꽂는 사람을 섬기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주변 사람이 모두 리더의 기분이 어떤지, 어떻게 해야 지적받지 않을지 살피기만 하는 조직이 있다면 그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공자는 군자와 소인의 결정적인 차이 가운데 하나를 이렇게 제시했다. “군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며,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쁘게 하기는 쉽다.” 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소인의 경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욕망만 채워주면 되니 기쁘게 하기 쉽다. 하지만 작은 이익에도 그것이 정당한지 아닌지 따지는 군자를 기쁘게 하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
감사원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을 놓고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서면 조사하겠다고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문 전 대통령과 민주당 측이 반발하자, 감사원은 1993년 노태우, 1998년 김영삼 전 대통령도 감사원 질문서를 받아 답변했노라고 해명했다. 두 사건을 직접 취재한 기자로서 감사원의 터무니없는 궤변과 퇴행이 씁쓸하다. 당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진실을 밝히는 데 핵심적이고도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노태우는 대규모 군수비리인 율곡사업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았고, 김영삼은 외환위기의 책임 문제가 불거져 있었다. 두 사안 모두 양 대통령이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었기에 조사는 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진상을 밝히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거셌다. 그렇다면 이번 감사는? 감사원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직..
임금의 장인을 모함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장모를 천민의 신분으로 전락시켜 관가의 노비로 삼았음은 물론, 왕비를 폐위시키려 한 신하가 있다면 왕의 친정체제 아래서 이런 신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조선의 임금 세종은 이런 행위를 한 박은, 유정현, 이직 등의 신하를 정치 보복하는 대신 고위 관료로 기용했다. 아버지 태종의 가혹한 정치 사슬을 끊음으로써 세종은 위대한 그의 시대를 스스로 열었다. 위대한 시대는 최고 권력자의 의지로 나타난다. 대통령의 비속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대통령의 언행은 국가의 얼굴이다. 사태의 본질은 비속어이지 외교 성과나 동맹관계 훼손이 아니다. 국민 누구나 성공적 외교 성과를 기대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대통령실이 발끈하고, 국민의힘이 문화방송을 고발하는 ..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에서 “이번 순방에서 그래도 많은 성과를 저는 거양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최근 해외 방문 외교에서 나름대로 많은 성과를 거뒀는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난 뒤 불거진 비속어논란이 그 성과를 모두 덮어버렸다고 믿는 것 같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그런 아쉬움을 표현할 자유도 있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비속어를 쓰지 말란 법도 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그러기도 하니까. 다만 한국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서 한국 국회든, 미국 의회든 ‘이 XX’라고 지칭한 사실은 전 세계에 사실로 굳어져 있고, 그가 이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사과를 하지 않은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왜 윤 대통령은 ‘성과를 거뒀다’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