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니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다. 나는 유물론자로서, 이런 기분은 해가 짧아지고 일조량이 줄어 호르몬 분비에 변화가 생긴 탓이라고 간단히 믿는 편이지만, 요즘 들어 아는 사람의 부고나 암 선고 소식을 자주 접한 탓도 있는 듯하다. 이런 소식이 예전과 달리 범상하게 들리지 않는 것은 이제 나도 노년이 머지않은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 진리에 한마디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병원에서 죽는다. 국민 10명 중 8명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니, 요즘의 죽음을 더 자세히 정의하는 게 좋겠다. 우리는 누구나 병원에서 아플 대로 아프다가 죽는다. 집에서 어르신의 상을 치른 친구가 죽음의 순간을 병원에서 맞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해..
첫번째 이야기. 피렌체의 두오모 대성당은 거대한 돔으로 유명하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도시국가 피렌체가 돔을 짓자고 결정할 당시만 해도 돔을 지을 건축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단 아이디어부터 던진 셈이다. 마침 브루넬레스키라는 사람이 옛날 로마 시대의 유적을 연구해 돔 짓는 법을 연구한 터라, 돔 건설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천재라는 명예를 누렸다. 아이디어 내는 사람이 따로 있고, 정말로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다. 명예는 누구에게 갔나? 피렌체 시의회가 아니라 브루넬레스키에게 돌아갔다. 물론 오랜 시간 노동자들의 수고 없이는 돔을 지을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두번째 이야기.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난초 그림을 잘 그렸다. 아들 고종 임금이 왕이 되기 전에도 난초 치는 솜씨가 유명했지만..
종종 이런 e메일을 받는다. “야구 기자가 되려면 어떤 학과를 가야 하나요? 메일 제목을 보며 한참 생각을 한다. 질문 앞에 두 글자를 붙여주고 싶다. ‘좋은 야구 기자가 되려면 어떤 학과를 가야 하나요?’ 사실 큰 차이는 없다. 답변에도 차이는 없다. “어차피, 야구 기자 학과는 없습니다라고 답을 하려다 백스페이스, 백스페이스, 백스페이스.(검색해보니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에는 스포츠 저널리즘 학사 과정이 있다) 스포츠에는 일종의 ‘조기 교육 신화’가 존재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재능을 드러내고, 특정 종목의 ‘한 우물’을 판 끝에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는 신화가 재생산되고 강화되는 세계다. 타이거 우즈가 대표적이다. 3세 때 골프 신동으로 TV에 출연했고, 같은 해 집 근처 정규 골프장 9홀을 돌면서 ..
“전체 인력의 87%를 협력업체에 의존하는 인천국제공항공사(이하 ‘공사’)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의 형국이다.” 10년 전인 2012년 6월 나온 ‘인천공항공사 민간위탁 노동자 실태와 직접고용 정규직화 방안 연구보고서’ 결론부의 진단이다. 공사는 외주화로 비용을 절감했고 하청업체들은 용역비에서 이윤을 챙기며 공사와 공생했다. 그러니 2017년 5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선 직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발표하고자 했을 때 다른 곳들을 제쳐두고서 공사를 방문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대통령 방문 당시의 슬로건이었다. 단어가 주는 착시효과가 있다. 어떤 이들은 공항에 ‘용역업체’ ‘협력업체’가 난무했을 때는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가, ‘자회사’로 ..
현재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간호법 제정을 둘러싸고 찬반이 분분하다. 대한간호협회는 간호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업무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간호법이 필요하다며 300일 넘게 1인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 등은 간호법이 간호사들만의 이익 추구를 위해 타 업무영역을 침해한다며 ‘간호법 제정 저지를 위한 총력투쟁’에 나서고 있다. 나는 뭔가 기시감이 든다. 2000년 의약분업 때, 1993년의 한약 분쟁 때, 그리고 2년 전의 의사 파업 때가 떠오른다. 피로감이 몰려오고 정신건강을 위해 아예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늙고 병든 어머니의 직접적인 돌봄 제공자이다. 어머니는 몇 년 전 심한..
어려서 구경한 가을 운동회 학부모 춤판은 볼만했어. 단풍이 든 교정 귀퉁이에 선생님과 학부모들이 같이 술을 자시고 급기야 춤판을 펼치셨는데, 기진맥진한 아부지들을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모셔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버스 여행을 떠난 동네 아짐들의 춤바람도 재미있었지. 방뎅이를 사정없이 휘젓는 버스춤은 쿠바의 살사나 아르헨티나의 탱고 거시기와 맞먹는 수준급 ‘토종 무용’이렷다. 읍내 동네에선 춤바람이 나설랑 가정을 버리고 순회공연(?)을 다니는 엄마 아빠가 한두 명쯤 꼭 있었다. 그래도 화투 놀음에 빠져 집을 버린 것보단 나은 케이스. “새빨간 드레스 걸쳐 입고 넘치는 그라스에 눈물지며 비 내리는 밤도 눈 내리는 밤도 춤추는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별빛도 달빛도 잠든 밤에 ..
전국의 도서관, 평생학습관, 문화센터 등 교육기관마다 중장년층이 넘친다. 가끔씩 이런 기관에서 특강을 하다 보면 쏟아지는 많은 질문에서 중장년층의 현실적 고민과 욕구들을 직시하게 된다. 이들은 뭔가 끊임없이 배우는 데도 공허하다고 얘기하는가 하면, 사회 공헌에 대한 의지는 가득하지만 한편으로는 적당한 돈도 벌고 싶다고 한다. 한마디로 ‘어떻게 하면 적당히 벌면서 의미 있게 잘 살 수 있을까?’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적당히’의 기준은 각각 다르겠지만, 오랫동안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적당히 벌고 잘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습·경험·관계맺기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핵심은 ‘새롭다’인데, 이 단순하고 뻔해 보이는 말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내가 지금까지 익숙했던 방식, 습관, 사고를 ..
한동훈은 ‘조선 제일의 검’으로 불렸다. 기분 나쁘지 않을 별명이다. 유능한 검사라는 뜻이니 말이다. 윤석열은 한 수 위였다. 그가 ‘강호 무림의 최고 칼잡이’라는 것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칼잡이의 지존이라는 표현이 좀 민망하게 들릴 수 있겠다 싶은데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것 역시 이름난 검사에게 붙이는 상찬(賞讚)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군대, 경찰 등과 함께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국가기구다. 국민의 재산권을 박탈하거나 신체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권력기관이다. 그래서 검사 자신들은 칼을 쓰는 무사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윤석열과 그의 수하 한동훈은 자기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고수인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두 무림 고수가 중원으로 나와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이 되면서부터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