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제11회 서울국제작가축제가 막을 내렸다. 축제의 대주제는 ‘월담’이었는데, 주제를 접하자마자 떠오른 것은 “담을 넘다”라는 의미였다. 축제 참가 섭외 전화를 받았을 때 산책하던 나는 주위를 올려다보며 막연히 어떤 담을 넘어야 하나 생각했다. 넘기 위해서는 먼저 담을 마주해야 했다. 우선적으로 혐오와 차별, 부조리 등으로 켜켜이 쌓인 사회적인 담을 직면해야 했다. 아주 오래되고 굳건한 담, 혼자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담. 그 담 앞에서 고개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개인적으로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과 나태함이라는 이름의 담을 넘어야 했다. 쓰는 습관이 익숙해질 때쯤 어김없이 찾아오는 담인데, ‘이만하면 됐다’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머릿속에서 기분 나..
15년 넘게 출퇴근길에 청와대 앞길을 지나다녔기에 대통령 관저 이전과 청와대 개방에 대해 나름의 소회가 있었는데, 이제야 청와대를 관람했다. 청와대 주변길과 근처 동네는 산 아래 터를 잡은, 오래된 서울 특유의 지세를 보여준다. 도심 한가운데지만 비교적 고즈넉하고 산록과 계곡에 기댄 의외의 장소가 많다. 계절에 따른 숲과 나무의 변화도 잘 느낄 수 있다. 동시에 청와대 근처는 엄혹하고 어두운 현대사의 기억이 깃든 곳들도 많다. 4·19 때 이승만의 부하들이 시민·학생들에게 총을 쏴 100명 넘게 죽고 상하게 만든 곳, 북에서 온 김신조부대와 군경이 교전하여 피 흘린 곳, 그리고 박정희가 부하의 총을 맞고 죽은 궁정동은 흔적만 남았는데도 섬찟했다. 그리고 지난 10여년 사이에 청와대 앞길과 주변 동네의 분..
불멍이 대세인데, 풀멍도 있지. 마당의 풀을 보며 멍때리기. 풀꽃이 필 때쯤이면 더는 풀이 번성하지 않아. 풀깎기, 풀뽑기에서 비로소 해방된다. 가을볕을 쬐며 눈알을 끔벅끔벅하면서 풀멍. 그간 땡볕을 피해 다녔는데, 사람이 간사하지. 은은한 볕이 이젠 반갑고 좋아라. 저녁에는 달을 보면서 달멍. 한 스승이 있었는데 제자들에게 ‘달을 달로만 그저 바라보기’를 주문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한 제자가 묻자, “며칠 굶은 사람은 달이 떡으로 보이게 되고, 사랑에 푹 빠진 자는 연인의 얼굴로 보이기 마련이다. 제대로 보려면 있는 그대로를 봐야 한단다.” 지인 중에 멍때리기 대회를 창시한 교주에 가까운 여동생이 있는데, 이름은 웁쓰양. 얼마 전에도 친구들과 멍때리기 대회를 했다. 멍때리기에선 무조건 웁쓰양이 킹왕짱..
강연장에서 퀴즈를 내어 청중의 주의를 환기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문제다. 많으면 많을수록 잘 안 보이는 것은? 영화 에 나오는 질문인데, 정답은 어둠이다. 여기에서 어둠은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시야의 장애물이다. 이런 논리라면 안개도 답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예전에 노숙인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이 문제를 냈을 때, 의외의 답이 나왔다. “눈물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한마디였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인생의 애절함이 배어나는 듯했다. 누구나 살면서 이따금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에서는 평생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런 인물 가운데 한 분이 김창열 화백이라는 것을 지난주 개봉한 다큐멘터리 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가 반세기 동안 천착해온 수십만 개 물방울의 정체는..
CT와 MRI 그 밖의 모든 검사 결과로는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단순한 편두통이라고 진단을 내린 뒤, 의사는 정확한 유발 요인이 알려지지 않은 질환이라고 덧붙였다. 환자는 납득할 수 없었다. 청소년기부터 이따금 칼로 관자놀이를 찌르는 것 같은 두통을 경험했다. 통증 때문에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두통의 발작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있었다. 그런데 원인을 알 수 없다니. 의사는 직업이나 대인 관계에서 비롯된 스트레스 때문일 수 있다면서, 두통이 특정 상황과 관련되어 생기는지 물었다. 환자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거짓말을 하면 머리가 아파요.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죠.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정직이 늘 최선은 아니에요. 거짓말은 생..
수습기자 시절 한 경찰관이 ‘단독 기사’라며 사건을 알려줬다. 30대 여성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었다. ‘변사 사건’을 보고하면 선배에게 ‘면피’할 수 있을 거라는 경찰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사람이 죽었는데 ‘보고’ ‘면피’를 떠올려야 하다니. ‘기자의 일이란 무엇인가.’ 그 후에도 그런 일은 반복됐다.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이 죽었는지 여부를, 사람이 죽었다면 많이 죽었는지 여부를, 사람이 어떻게 죽었고 사건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경중을 따지는 대화를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사건은 대상화됐다. 성범죄 피해자의 일기를 ‘후속 보도’의 재료로 쓰고 사건을 부를 때 피해자를 호명하면서도 사건이 ‘도구화’됐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 기자의 시각은 피해자의 고통과 멀어진다. 사람이 희생된 사건,..
최근 청주시청사 본관 존폐가 새삼스럽게 논란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주시청사는 근대건축 전문가 사이에서 보존가치가 크다는 데 이견이 없는 건축가 강명구의 작품이다. 문화재청에서도 보존을 권고했고, 청주시에도 보존 의지가 있다고 알고 있었기에 존폐 논란은 매우 놀라웠다. 게다가 철거해야 한다는 이유가 일본색이 강한 건축이라는 주장은 귀를 의심케 했다. 우리나라 근현대 건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침묵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주시청사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일제강점기의 관성이 남아있던 낡은 지방행정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건축된 것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목조 청사나 벽돌조 청사와는 달리 철근콘크리트조 건축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지향하며 청..
정치권에선 매일 크고 작은 도원결의가 맺어지고, 그만큼의 배신행위가 발생한다. 어제의 동지가 다음날 원수가 된 풍경은 낯설지 않다. 정치연합의 붕괴, 정치인들의 결별, 탈당 등이 이런 사례들이다. 큰 배신에 가려진 작은 배신들은 더 많다. 당내 선거나 국회의원 예비 경선 때 특정 캠프에서 일했던 인사가 경쟁 캠프로 옮겨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업비밀’을 누설하는 경우를 봤다. 형, 동생 하던 사이가 같은 지역구를 놓고 경쟁하면서 어색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못 믿을 인간들만 정치권에 모여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리지어 권력을 다투고, 이기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판의 속성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배신이냐’이다. 드물지만 명분 있는 배신은 결단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가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