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진 DJ’의 얼굴이 선연하다. 1996년 총선 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단독 영수회담한 날이다. 브리핑하던 DJ는 요체만 말한 뒤 당사 지하 복집에 가서 마저 얘기하자고 했다. “칼국수 내놨는데 그것도 대통령 말 듣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YS는 소식가, DJ는 대식가였다. ‘십중팔구는 영수회담의 주도권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할 때 떠올리는 컷이다.영수(領袖). 정치조직 우두머리를 뜻하는 이 말은 오래전부터 대통령과 야당대표 회담에 붙여졌다. 한자가 다르지만, 여당 총재인 대통령(領)과 당수(黨首)의 끝말을 합쳤다고 풀기도 했다. 회담은 화전(和戰)의 고빗길이거나 국가 의제를 놓고 담판을 짓는 자리였다. 1990년 3월 DJ와 노태우 대통령 회동이 대표적이다. 대통..
2020년 새해 국회에서 청년기본법이 통과되었다. 법안 발의 1319일 만의 결실이다. 법안이 통과되던 날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청년도 있었다. 이런 날이 올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안 통과까지 수많은 청년 활동가들이 노력을 했다. 그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청년기본법은 여야 간 이견이 없었던 비쟁점법안이었다. 그러나 보수야당의 발목 잡기에 법안 통과는 녹록지 않았다. 20대 국회 1호 법안을 청년기본법으로 발의하고도 청년의 삶을 외면하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지금 총선을 앞두고 청년과 ‘동반자’가 되겠다고 한다. 보수야당과 정치인들의 이런 행태들에 더 화가 난다.학교를 졸업하고 취업까지는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사이 돈 ..
# 넉달 전 끔찍한 추석이었다. 저녁상을 일찍 물리고서다. “그 놈아 참 못쓰겠더만.” 공기업 다니는 큰형(59)이 TV를 가리켰다. 사흘 전 대통령이 임명한 조국 법무부장관이 보였다. “아따 못쓰긴 뭐가 못써요. 형도 저런 종편이나 유튜브만 보지 말라니까.” 구보씨(54) 목소리가 커졌다. 막 데친 김치전에 두세 잔 돌던 술상이 얼어붙었다. 서울·대전의 집값 얘기를 주고받다 TV 틀자마자 조국 얘기로 불똥이 튄 것이다. 만두를 빚던 형수와 아내도 놀라 부엌에서 나왔다. 조국 퇴진(큰형)-중립(형수)-검찰개혁(구보씨 부부). 1대 1대 2로 시작된 말싸움은 “아주버님도 ‘개독’ 페친들 끊으세요”란 아내 말에 교회 다니는 형수가 “왜 동서 그런 말까지…”라고 발끈하며 2대 2가 됐다. 늦게 도착한 둘째형이..
대전에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내 시설에서 지난해 말 고농도 방사성물질이 유출된 사실이 확인됐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지난 22일 “세슘137, 세슘134, 코발트60 등 인공 방사성 핵종이 연구원 내 자연증발시설 주변 우수관으로 방출됐다는 보고를 21일 받았다”고 밝혔다. 원자력연구원은 지난해 12월30일 연구원 정문 앞 하천 토양에서 시료를 채취해 지난 6일 분석한 결과 방사능 농도가 최근 3년 평균치의 59배(25.5㏃/㎏)로 측정됐다.자연증발시설은 실험과 연구과정에서 나온 액체 방사성폐기물을 태양열로 증발시키는 시설로, 연구원은 여기서 처리되는 방사성폐기물은 극저준위 수준으로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고 설명해 왔다. 그런데 이 시설 앞 맨홀에서 고농도의 방사성 세슘134, 137과 코발트60 등이 측정..
육군이 휴가 중에 성전환 수술한 변희수 하사를 “군인사법 등 관계 법령상의 기준에 따라 계속 복무할 수 없는 사유에 해당한다”며 강제 전역시켰다. 성전환 후 여군으로 근무하고 싶다는 변 하사의 뜻과 달리 군인사법 시행규칙에 규정돼 있는 장애등급 규정을 적용,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리고 23일부터 군에서 내보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시민단체 군인권센터의 진정을 받아들여 법원의 성별 정정 이후로 전역심사를 연기하라고 권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 당국이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은 이해할 수 있다. 변 하사가 성전환 수술 후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고 싶다고 한 것은 창군 이래 처음 있는 일이어서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국민 개병제를 바탕으로 병력을 운용하는 군 입장에서는 장병 전체의 분위기도 감안해야 했을 터..
법무부가 23일 고검 검사급 검사 257명, 평검사 502명 등에 대한 검사 인사를 단행했다. 조국 전 법무장관 일가 비리의혹, 청와대 감찰 무마·선거개입 의혹 등 이른바 ‘정권 수사’를 지휘해온 일선 검찰청 차장검사들이 모두 교체됐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전원 유임’ 의견을 낸 대검찰청 중간 간부 상당수도 전보조치됐다. 다만 이들의 지휘를 받던 부장검사 및 수사 검사 대부분은 현직을 유지했다. ‘수사팀 공중분해’라는 상황은 피하면서 현 수사의 흐름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 기대되는 인사로 평가된다.법무부는 인사 배경에 대해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했다. 윤 총장 측근들을 대거 검찰 중심에 포진시킨 지난해 7월 인사를 바로잡는 조치라는 것이다. 수사 중심을 직접수사부서에서 형사·공판부로 이동시켜 홀대..
가을걷이가 끝나고 벼 그루터기만 남은 논에 서리가 내리면 어른들은 서둘러 겨울 맞을 채비를 하곤 했다. 떼어낸 문틀에 두 겹의 창호지를 바르고 그 사이에 국화잎을 몇 장 집어넣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나중에 소읍으로 이사갔을 때는 광에 시커먼 연탄을 쌓아두었지만 시골에서는 겨우내 볏짚을 땔감으로 썼다. 바람 잘 통하는 대청마루에는 통가리가 놓이고 두어 가마 고구마도 채워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김장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월동 준비라는 말에서조차 격세지감이 든다.올겨울은 눈도 거의 없고 살을 에는 강추위도 아직 찾아오지 않아 부는 바람에서 봄뜻이 설핏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니까 더운 여름보다 체온을 유지하는 데 우리가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캐나다 북쪽 원주민 검은 발족의 추장 까마귀 발의 노래다. “삶은 이와 같은 거라네. 어둔 밤을 밝히는 반딧불이. 겨울 한복판에 들소가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 푸른 초원을 달려가다가 땅거미 지는 노을에 사라져가는 작은 그림자.” 들소의 코에서 훅훅 나오는 콧김이 떠오른다. 그리고 땅거미. 거대한 평지 대륙에 드리운 어스름이 그립다.저녁의 느낌은 늘 찌릿하다. 가수 김목인은 말했다. “밤이 오기 전 하늘은 살짝 밝아져 있었다. 슈퍼 앞 평상의 아저씨는 맥주 한 컵을 들고 아이들이 게임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엄마들이 아이들을 타이르는 소리. 저녁이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을 암시하고 있었다.”다세대주택 골목 어딘가 드리운 저녁. 옥상에서 보이는 건너 공터의 땅거미.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