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메일을 열어보는 손끝이 떨렸다. “이태원 사고 희생자를 위한 교내 합동 분향소 설치를 안내하오니, 애도의 마음을 함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읽으면서, ‘아’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갑자기 눈이 뜨거워졌다. 참사의 희생자들이 바로 옆에 있었다는 실감이 밀려왔다. 중앙대 대학원생 3명이 희생되었다. 모두 유학생들이었다. 캠퍼스에서 한 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를 예비 석사, 박사들이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반 뼘쯤 땅에서 떠 있는 상태로 생활하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 희생된 사람들의 사연들, 유족들의 절규와 통곡,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들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그런 나 자신이 낯설었다. 숱한 죽음의 이야기들을 현장과 거리를 둔 채 읽으며 슬퍼했..
정부가 과로사회로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최근 30인 미만 기업의 추가연장근로제 시한을 2년 더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해외 건설노동자들에게는 특별한 사정이 생겼을 때 주 64시간 이내까지 연장노동이 가능하도록 했다. 무한 노동으로의 질주를 보는 듯하다.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할 상황은 누가 책임질 것인지 모르겠다. 저임금, 영세, 고령, 간접고용, 여성 등 취약노동자에게 더 가혹한 상황이 될 것 같다. 제조업과 건설업의 장시간 노동 문제는 오래된 이야기다. 병원 간호사, 판교 IT 개발자, 유통 판매직 노동자 4명 중 1명은 52시간 이상 일한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크런치 모드와 같은 집중 업무는 IT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대표적 문제점 ..
허공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게 아니라서, 문득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들고 창문을 바라보는 순간, 어떤 물체가 유리창에 부딪혀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방금 읽다만 소설 속의 일일까,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2층 사무실 베란다로 얼른 내려갔다. 어이쿠, 내 짐작이 맞았다. 화분들 사이에 미동도 않고 가만히 있는 건 한 마리의 작은 새였다. 주먹만 한 새는 추락하는 동안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한 듯했다. 다행히 그 와중에도 두 다리로 몸뚱이를 버티며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뇌진탕인가. 한쪽 발도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뭔가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불길한 징조가 하나 더 있었다. 바닥에 닿아 있는 새의 꼬리였다. 새..
벌써 16년 전 일이다. ‘그린보트’ 두 번째 출항에 여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탔다. 보름 동안 1000명 이상이 한배를 타고 진행하는 연수 과정이라 아이랑 너무 오래 떨어지는 게 힘들어 함께 배에 올랐다. 어찌저찌 일을 보다 첫날 갑자기 아이를 선내에서 잃어버렸다. 8층짜리 건물 크기 크루즈선이라 정신이 아득했다. 나 역시 처음 타보는 배라서 잔뜩 긴장하며 문마다 열고 다녔는데, 어느 문을 하나 열고는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시퍼런 파도가 난간에 들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은 매우 무겁지만 만약에 아이가 이걸 열고 나갔을 생각이 들자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지나가는 우리 직원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나 좀 살려줘”라고 말했다. 여섯 살짜리 아이를 이 배에서 잃어버렸는데, 어디서도 안 보..
이태원의 좁디좁은 골목에서 150명이 넘는 소중한 생명이 허망한 죽음을 맞은 다음날 아침. 국민의 안전을 총책임지고 있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말은 귀를 의심케 했다.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머리 숙여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희생자들과 유족, 국민들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책임 회피였다. 정부는 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정해 정쟁을 멈추자고 하면서 이번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기하는 지침을 내놓았다. 참사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기보다 자신들에게 미칠 후폭풍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정부는 참사를 막지 못한 제도적 한계도 주장하고 나섰..
언제부턴가 전북 익산시의 심벌마크에 눈길이 갔다. 익산의 대표 문화재인 미륵사지 석탑을 이미지화해 디자인한 것이다. 그런데 심벌마크 속 미륵사지 석탑은 온전하지 않다. 탑의 한쪽 옥개석들이 아래로 기울어 무너지는 듯한 모습이다. 그 옥개석의 기울어진 선(線)을 익산의 ‘益’자와 절묘하게 연결시켰다. 이 심벌마크에서 무너져 내리는 듯한 옥개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미륵사지 석탑을 어떻게 기억해왔을까. 흔히 이 탑을 두고 7세기 백제의 석탑, 현존하는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석탑으로 설명한다. 그렇다. 하지만 기억의 측면에서 보면, 더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탑의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그 위태로운 부분이 콘크리트로 덧씌워져 있는 모습..
(44) 덕수궁 돌담길 1971년, 2022년 덕수궁 돌담길.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연인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드라마 에서 우영우 변호사가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걷던 남자에게 묻는다. 덕수궁 돌담길은 ‘걷다’보다는 ‘거닐다’가 어울리는 한가로운 산책길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조선의 왕이 살았던 덕수궁의 돌담길은 고종에게는 한가로운 길이 아니었다. 덕수궁의 원래 명칭은 ‘경운궁’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살해된 후, 고종이 거처를 경복궁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덕수궁’으로 현판이 바뀌었다. 덕수궁 돌담은 러시아공사관의 담과 맞닿아 있었는데 여차하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위한 지름길이었다. 덕수궁 돌담부터 러시아공사관까지 거리는 120m밖에..
토트넘 홋스퍼의 손흥민이 지난 1일(현지시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조별리그 D조 올림피크 마르세유(프랑스)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 어깨에 얼굴을 부딪쳐 치료받고 있다. 한국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은 안면골절 수술을 받게 돼 2022 카타르 월드컵 출전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마르세유/AP연합뉴스 손흥민은 22세 때 월드컵에 처음 나갔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다. 그 대회에서 1골을 넣었다. 알제리를 상대한 조별리그 2차전 후반 5분에 자신의 월드컵 첫 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골 세리머니를 하지 못했다. 한국이 0-3으로 지고 있던 터라 기뻐할 새가 없었다. 그 경기가 결국 2-4 패배로 끝나자 손흥민은 홀로 땅을 치며 대성통곡했다. 그때부터 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