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사 학위를 받은 제자가 학회에 처음 발표하러 다녀왔다. 사회학자 박영신을 중심으로 해서 1970년대부터 학회지를 발간해온 유서 깊은 학회인데, 신진학자 발표 자리를 흔쾌히 마련했다. 막스 베버의 이론을 활용하여 한국 사회를 분석한 걸 높게 평가한 듯하다. 학회에서 돌아온 제자가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갓 박사 학위를 받은 저를 깍듯이 학자로 대해주셨어요.” 할아버지뻘 되는 원로학자가 30대 초반의 초짜 박사를 마치 동등한 학자인 양 존중했다. 그 어려운 막스 베버의 이론을 분석적으로 재구성하여 한국 사회에 적용하였다 한들, 평생 학문에 몸 바친 원로학자의 눈에 뭐 그리 대단하게 보였겠는가? 그런데도 두 세대나 아래인 젊은 박사의 연구를 귀히 여겨 초청해서 경청했다. 김덕영이 쓴 ..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촬영된 동영상 클립들을 보면, 참사는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인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몇 시간 전부터 신고 전화가 이어졌고, 질서 있게 군중을 해산시킬 수 있는 ‘골든 타임’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방관했고, 감당할 수 없을 수준으로 군중의 밀집도가 높아지면서 순식간에 참사가 일어났다. 이태원 희생자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태원 참사는 ‘제2의 세월호 참사’이다. 안전과 관련된 참사뿐만이 아니다. 미리 대비하지 못하면 경제적 참사도 발생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1997년 경제위기를 겪었고,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다가오는 탄소중립 시대의 위기에 우리 정부는 사실상 두 손을 놓고 있다. 이대..
지난달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법인세 감세를 부자감세라 주장하는 것은 정치과정에서 제기된 구호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법인세 최고세율을 3%포인트 낮추는 내용 등을 담은 정부 개편안을 지지하면서 “최근 법인세율 체계 개편안 발표 이후 이러한 주장(부자감세)이 제기되는 것은 민생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국력을 집중해야 할 시점에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KDI 내부에서 보고서 내용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검토 보고서가 제출됐지만 묵살된 것으로 국감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보고서가 공개되기 전 KDI와 기획재정부는 합동정책간담회도 열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국감 기간에 보고서를 내세워 법인세 감면을 옹호했다. 지난 6월 한덕수 국무총리가 홍장표 KDI 원장을 두고 ..
저승이 어딘지 똑똑히는 모르겠지만 이승은 햇빛이 지휘하고 관할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직진하는 빛은 항상 내 곁에 그림자 하나를 세워둔다. 어릴 땐 가까운 친구이더니 이제는 언젠가 가야 할 곳을 지키는 보초 같다. 눈은 발광체가 아니라서 태양의 빛에 의지해서 사물을 보는바, 그 빛의 성질에 개입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만약 눈에서 나가는 시선을 조절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나와 너 사이에 있을지도 모를 ‘섬’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바로 눈앞의 세계가 불변인 척하면서 실은 깜쪽같이 변화하고 있다는 낌새를 최근에 눈치채게 되었다. 눈 한번 깜빡해도 세상은 조금 차이가 난다. 눈앞은 그냥 뻔하고 빤한 곳이 아니라 그야말로 변화무쌍의 현장이다. 시시각각 아찔한 절벽을 세우고 허물기를 반복한다...
지난 8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한국의 장기 경제성장률 전망 보고서는 2050년의 경제성장률이 0.5%에 그치고 사실상 ‘제로성장’이 예상된다고 전한다. 인구 감소와 급속한 고령화 같은 변화가 성장세가 둔화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생산연령 인구 비중이 2020년 72.1%에서 2050년 51.1%로 하락하면서 2041년부터 매년 국내총생산(GDP)이 평균 0.7%씩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제로성장이라는 미래에 많은 사람들, 특히 경제 전문지들은 큰 우려를 표한다. 경제성장률은 우리의 일자리이고 소득이고 선진국의 지표이며 자존감이기 때문이다. 산업화를 먼저 시작한 많은 강대국들이 제로에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는 한국은 아직 예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2050년은 한국..
재정건전성 강화 기조 아래 편성된 내년도 예산안과 관련하여 윤석열 정부가 강조한 약자복지의 진정성과 실체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 위기 이전부터 여러 국제기구들은 불평등과 격차 심화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안전망 강화를 강조해왔다. 개별 국가에서도 코로나 대응뿐만 아니라 회복 과정에서 직면한 고물가 상황 등 취약계층에게 더욱 가혹한 경제 여건 속에 국민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재정의 역할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약자복지의 방향과 적절성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약자복지라도 실천하려는 정부 의지가 예산안에 제대로 반영됐는지 세심하게 묻고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국회는 이를 꼼꼼하게 심의하고 조정하여 국민의 삶이 불안정해지지 않도록 일상을 지켜야 한다. 그..
(46) 독립문 1971년, 2021년 독립문.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에는 두 개의 중요한 사적이 있다. 하나는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이 갇혀서 고초를 겪었던 서대문형무소이다. 공원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 내려오면 또 하나의 사적이 보이는데, 바로 독립문이다. 기공식은 1896년 11월21일에 열렸는데, 그 1년 전에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있었고 그 1년 후에는 대한제국이 선포되었으니 독립문은 어지러운 구한말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것이다. 독립문 사진을 잘 보면 앞에 두 개의 큰 주춧돌이 보인다. 이것은 영은문(迎恩門)의 주초로서 원래 그 위에는 나무로 된 홍살문과 청기와가 얹혀 있었다. ‘영은’은 “은혜를 베푼 사신을 영접한다”는 의미인데, 중국의 사신..
서울시가 17일 공개한 ‘고독사 위험 현황’에 따르면 2021년 서울에서 발생한 고독사가 전년보다 16.4% 늘었다. 김상민 기자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에서 “인생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고 했다. 이런 삶을 살다가, 쓸쓸히 홀로 죽음을 맞는 고독사는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일찌감치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이 고독사가 많은 나라로 익히 알려졌지만, 한국의 고독사 추정 인구 또한 근래에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보건복지부 집계치가 2018년 2447명, 2019년 2656명, 2020년 3136명, 2021년 3603명으로 증가했고 올해는 상반기에만 2314명이라고 한다.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지난해 4월부터 고독사 예방법을 시행하고 있다. 법 시행 후 전국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