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안 자체에 압도당할 때가 있다. 이번이 그런 경우이다.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이여, 부디 좋은 곳에 가시길. 모든 고통을 잊고 자유롭고 평온하시기를.” 2022년 가을, 서울이란 대도시 한복판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참사가 이어졌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는 지하에 있는 집이, 선선한 가을밤에는 인파가 몰린 이태원 거리가 그런 일이 벌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그다지 위험하다고 여겨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파도가 거친 새벽 바다도 아니었으니까. 어느 누구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특히 그 거리에는 많은 이들이 가고 싶어 했고, 수시로 찾아가기도 했다. 어떤 이들에게 그곳은 삶의 터전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한 그 밤이 지났고,..
마음이 무겁다. 꽃다운 이들이 스러졌다. 교단의 일원으로서 유구무언일 따름이다. 자식을 키우고 있는 부모로서는 피눈물이 날 지경이다. 억울한 젊은 영혼들 앞에 마뜩한 진혼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 ‘헬조선’이라는 얘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경제는 효율성만 좇아 양극화되었고 정치는 깃털같이 가벼웠으며 안보는 충돌 전야를 방불케 했다. 다행스럽게 당시의 젊은이들은 ‘헬조선’이라는 난파선을 탈출하기보다는 부서진 함선을 직접 개조하는 위대한 여정에 나섰다. 촛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광장정치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권부의 무책임성에 대한 조건 반사로 시작해, 정치·경제·안보 상황이 직면한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직접정치로 진화했다. ‘촛불혁명의 위임권력’임을 자처한 문재인 정부 5년의 실험..
한 그루의 나무에 넓은 땅을 내어주는 게 불가능하리라 여겨지는 서울 도심에서 이례적으로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600년 된 큰 은행나무가 있다. 서울 방학동 은행나무다. 하늘 향해 25m까지 솟아오른 나무는 지름 20m가 넘는 원형 공간의 땅을 홀로 차지했다. 이 나무는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해 여주로 떠날 때 치성을 올린 나무라고도 하고, 조선 후기 경복궁 증축 때 징목(徵木) 대상에 선정되어 베어내야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대원군에게 간청하여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대감 나무’라는 별명은 그래서 붙여졌다. 장대한 위용의 ‘서울 방학동 은행나무’는 크고 아름다운 나무라는 점에서도 보존 가치가 높지만, 정작 더 특별한 건 사람들의 극진한 배려를 받으며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사람 중심의 ..
벌써 세 번째이다. 보수 정부에서 위험이 핵심적인 사회현상으로 등장하는 것 말이다.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정부 때에도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지금과는 양상이 달랐다.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던 수많은 사고는 회유 혹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취약한 사회 인프라로 인한 일상의 위험은 숙명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 때의 광우병 사태와 4대강 사업, 박근혜 정부 때의 세월호 참사, 그리고 윤석열 정부 들어 일어난 이태원 참사는 이제 고질화해가는 보수 정부의 패턴처럼 느껴져서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이명박 정부는 위험의 사회화와 그 반작용으로서의 위험의 정치화를 최초로 경험했다. 이익을 보는 집단은 분명한데 그에 따르는 위험은 불특정 다수에게로 분산시켜버릴 때,..
종이에 펜(27.5×35㎝) 빽빽하게 가득 차 있는 언덕 위의 집들과 아파트를 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너와 나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면 적당할까요? 서로 웃음 지으며 인사하고 때론 부딪치고 짜증 내며 살아가던 이웃들이 갑자기 가깝게 다가오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습니다. 서로 적당히 알고 적당히 모른 척하며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서로 편한 관계로 오래갈 거 같습니다. 답답한 골목길에서, 답답한 만원 지하철에서, 답답한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신들 사상은 잘못됐어. 반대하는 의견들을 무시하잖아!” 며칠 전 지역 행사에서 들었던 분노에 찬 발언이다. 토론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참석자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 분노를 표출하기 전까지 자신을 보라는 듯 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당시 토론회는 혐오와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연대와 인권교육을 주제로 여러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발제자와 토론자의 발언이 끝난 뒤 이어지는 질문 시간에 그는 당신들이 반대 의견을 무시한다고 울분을 터트리며 격앙을 이어갔다. 끝을 예상할 수 없는 뜨겁고 거친 발언이 이어질수록, 청중과 참석자는 얼어붙고 초조해졌다. 그는 줄곧 동성애 반대를 주창하며 말을 이어갔다. 토론회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신의 이야기들이었다. 얼마 전 열린 ..
올해는 1972년 국토종합개발계획이 처음 시행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을 계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한 지 10년 후인 1972년, 우리 국토의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개발을 위하여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2~1981)이 시행되었다. 국토종합개발계획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승인하는 법정 계획으로 국토와 지역, 도시 분야 최상위 계획의 위상을 갖는다. 이 계획에 의거하여 경제개발과 국민의 생활환경 개선을 뒷받침하는 도로, 철도, 공항, 항만, 댐, 산업단지, 관광단지 등 각종 사회간접자본이 건설되었다. 경제개발이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뀌면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국민의 삶의 터전인 국토에 대한..
현대인들에게 판단력과 분별력은 개개인의 행복 지수, 건강(수명), 경제 상황 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사회 전체의 안녕과 발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 사람들은 뛰어나다”라고 한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방법으로 일을 되게 하는 능력, 가시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또는 승부에서 이기는) 능력, 뛰어난 예술적 창의성 등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그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에 대해서조차도 합리적인 판단이나 분별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판단과 분별은 의미가 살짝 다르다. 분별은 어떤 것들의 차이를 인지하거나,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을 뜻한다. 좋은 판단력을 갖기 위해서는 당연히 논리적인 사고력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