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29일 밤, 서울 용산 이태원동 119-7번지 골목에서 두 번째 세월호가 침몰했다. ‘두 번째 세월호’란 말을 수차례 쓰고 지웠다. 한 번 비극을 겪었다고 다음 비극이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웃다가도 심란하고, 자다가도 수시로 깼던 지난 한 달이었다. ‘두 번째 세월호’는 참사 규모만 해당하지 않는다. 유족을 향해 ‘시체장사’라 하더니 이번엔 ‘감성팔이’라 비난하고, 꼬리 자르기식 책임 전가가 등장하는 장면도 8년 전과 유사하다. 애도와 추모를 탈정치로 몰고 가려는 시도 또한 낯설지 않다. ‘두 번째 세월호’는 국가 권력의 총체적 무능이 한 사회를 유지하는 상식적 기준을 무너뜨렸고 정치적 내전을 불사했던 상황을 집약한 말이다. 정부가 사고라 고집해도 이태원 참사는 명백한 정치적 참사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가르쳐 드릴까요. 열일곱 살이에요.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전시장에는 박단마(朴丹馬)의 1938년 유성기판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이 극에 달할 때에 요즈음 걸그룹 같은 박단마의 인기절정의 사랑노래다. 지금 미국 LA카운티뮤지엄(LACMA·라크마)에서 ‘한국 미술의 근대 - 사이의 공간 The Space Between’과 ‘박대성 - 생명의 필묵 Virtuous Ink and Contemporary Brush’가 나란히 열리고 있다. 전자가 유화·사진·조각 130점이고, 후자는 초대형 필묵 작품 8점인데, 이런 대칭적인 전시구도로 서울에서는 열린 적이 없다. 이미 한국은 서화에서 미술로 예술의 판도가 뒤집어졌고, 사진은 여전히 ..
한 달여 비워둔 집 엉거주춤 남의 집인 양 들어서는데 마실 다녀오던 아랫집 어머니가 당신 집처럼 마당으로 성큼 들어와 꼬옥 안아주신다 괜찮을 거라고 아파서 먼 길 다녀온 걸 어찌 아시고 걱정마라고, 우덜이 다 뽑아 김치 담았다고 얼까 봐 남은 무는 항아리 속에 넣었다고 가리키는 손길 따라 평상을 살펴보니, 알타리 김치통 옆에 늙은 호박들 펑퍼짐하게 서로 기대어 앉아있고, 항아리 속엔 희푸른 무가 가득, 키 낮은 줄엔 무청이 나란히 매달려 있다. 삐이이 짹짹, 참새떼가 몇 번 나뭇가지 옮겨 앉는 사이, 앞집 어머니와 옆집 어머니도 기웃하더니 우리 집 마당이 금세 방앗간이 되었다. 둥근 스뎅 그릇 속 하얗고 푸른 동치미와 살얼음 든 연시와 아랫집 메주가 같이 숨 쉬는 평상, 이웃들 손길 닿은 자리마다 흥성스..
(47) 설악산 흔들바위 1971년, 2022년 설악산 흔들바위.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설악산 흔들바위를 밀어서 떨어뜨리는 자, 강호 무림을 평정하는 초고수가 될 것인가? 무림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바위에 꽂혀 있는 칼을 뽑는 자가, 왕이 될 것이다’라는 아서왕 검의 전설에 여러 문파들이 도전을 했고 잃어버린 절대반지를 찾아 제왕이 되려는 사파들이 전쟁을 일으켜 강호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적막, 설악산이 화산폭발의 화산재 연기로 대청봉마저 보이지 않고 영겁의 시간이 흘렀다. 비바람, 풍화작용에 흔들바위가 깎여, 아스라이 둥그런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강호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무리하게 공력을 끌어들이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마인(魔人)이 일엽편주를 타고 설악산 강호에 숨어들었다. ..
바야흐로 빅 데이터 시대, 지식정보사회의 전성기다. 지식정보사회라는 용어는 친숙하다. 40여년 전 다니엘 벨과 앨빈 토플러 같은 쟁쟁한 미래학자들이 처음 언급한 이래, 적어도 2000년대부터는 너도나도 떠들어댄 덕분이다. 하지만 이를 피부로 느끼는 것은 소위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부르는 최근 들어서다. 쇼핑, 여행, 오락, SNS 소통 등 우리의 일상이 어딘가에 기록되고, 이게 쌓인 정보가 엄청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1990년 후반 두 명의 대학원생에 의해 허름한 차고에서 출발한 구글의 시가 총액은 2000조원이 넘으며, 2000년대 초반 한 학부생이 기숙사에서 친구들 프로필 공유 사이트를 만들면서 시작한 페이스북(메타)의 시가 총액은 500조원에 달한다(지난..
케이틀린 제너(사진 왼쪽에서 세번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남자 육상선수 출신으로 카다시안 자매들의 의붓 아버지였으나 2015년 커밍아웃 이후 성전환수술을 받았다. 사진은 같은 해 ‘아버지의 날’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 출처 케이틀린 제너 트위터 생물학적 남성 A씨는 결혼한 뒤에야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달았다. 2018년 이혼한 그는 성전환 수술을 받고 이듬해 법원에 성별정정 신청을 냈다. “가족관계등록부 성별란에 ‘남’으로 기록된 것을 ‘여’로 정정하도록 허가해달라”는 것이었다. 1·2심은 이를 불허했다. 미성년인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가 ‘여성’이 되면 “정신적 혼란과 충격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개인의 행복 추구보다 부모로서 의무가 더 중요하다고 본 2011년 대법원 판..
한국의 정치 이미지 안에는 아직도 전근대적 절대권력의 망령이 서려 있다. 정치인들은 국가를 오직 권력으로만 이해하며, 통치자는 그 위에 군림하는 군주쯤으로 여긴다. 그 부인을 국모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세력을 악의 축으로 여긴다. 또한 재벌과 결탁하며 사회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어간다. 여기에 검찰과 경찰을 장악함으로써 일찍이 알투세가 말한 ‘억압적 국가장치’를 완성한다. 그런 정치에게도 언론은 늘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이다. 이번 MBC 사태는 윤석열 정부의 언론관이 잘못되었거나 ‘속이 좁아서’ 생긴 일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언론을 적극적으로 길들이고자 하는 현 정부의 다급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이라고 본다. 혹은 현 정부가 권력과 국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북 구미에서 김천으로 가다 보면 굽은 길을 정면으로 품고 있는 작은 산 하나를 만난다. 아빠는 정확한 위치도 이름도 모르는 그 평범한 야산을 지날 때마다 ‘저 산의 능선이 꼭 박정희 대통령이 누워 계신 모습 같다’고 하며 산등성이를 손가락으로 이어 눈, 코, 입을 그린다. 아빠의 애절한 충성심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한 대통령의 결단과 카리스마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지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충북 옥천 부근에선 서글픈 애도가 된다. 그렇게 눈물을 훔친 아빠는 목적지인 서울까지 가는 동안 망해가는 조국의 미래를 염려한다. 나는 아빠의 입에서 ‘네가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 찬양과 비관을 밀어낸다. 결말이 없는 이야기는 언제나 ‘정치 이야기만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