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늙어가는 공영방송론자다. 넷플릭스, 유튜브, 아마존 프라임의 시대가 열렸지만, 나는 아직도 시민들에게 무료로 고품질 방송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고품질 방송이란 공정한 뉴스, 역사 드라마, 코미디, 국가대표 스포츠 중계, 재난 정보를 포함한다. 이런 내가 공영방송 사업자에 실망하는 이유는 내용이 공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기술적 혁신에 실패해서 디지털 역무를 제공하는 지상파 플랫폼을 만들어 내지 못해서 그렇다. 나는 멸종하는 자유주의 신문론자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온갖 수준의 정보와 오락물이 넘치는 가운데 신문이 이용자의 선택을 받아서 수익을 내지 못하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믿는다. 여기서 자유란 국가의 간섭과 기업과 시민사회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해서 자율적으로 편집..
공공부문 총파업이 줄줄이 예고된 가운데 정부와 여당은 볼모론과 불법 규정, 침소봉대와 강경 대응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다. ‘나 때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는 기자들이 넥타이 매고 정자세로 경청했다’는 말만큼이나 식상하다. 식상한 대응은 적절한 대응이 궁할 때 나오는 행동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번 총파업을 ‘국가 경제를 볼모로 한 이기적 행동’으로 규정하면서 이로 인해 국가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것처럼 과장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사실상 정권 퇴진 운동’이라며 확대해 이번 총파업을 정치적 파업으로 규정했다. 과연 우리나라 경제가 일부 공공부문 총파업으로 위기에 처할 수준인가. 물론 굳이 왜 이 어려운 시기에 파업을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
꽃을 솎는 일은 나무에게서 나비를 빼앗는 일 이유 없이 헤어진다 한 꽃이 다른 꽃들과 비바람과 벌레와 새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어줌으로 농부의 곁을 지켜주는 과일을 먹는다 파치의 시간으로 잠들고 깨어나는 나는 가슴에 몇백 개의 꿈을 더 가졌다 나는 갖가지 영혼의 양초를 파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상한 과일들이 빌려준 시간 속으로 성한 과일들이 들어온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인 그림자 속으로 달콤한 햇빛 한 줌 기울어온다 조현정(1971~) 약간 벌레 먹은 것이나 비바람에 떨어져 멍이 든 복숭아를 싸게 사 먹은 적 있다. 파치 중에서 그나마 성한 걸 골라 팔고, 상태가 안 좋은 것들은 버려졌을 것이다. 배달된 복숭아를 칼로 도려내며 먹다 보니, 정품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농부는 온전한 과일을 생산하기..
“도대체 누구를 위한 파업인가. 민주노총의 오만한 대국민 협박에 진저리가 난다.” 지난 22일 국민의힘은 최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이 같은 논평을 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귀족노조’ 프레임을 다시 들고 나왔고, “생때같은 줄파업” “불법투쟁” “대국민 갑질” 등의 발언이 여당 쪽에서 일제히 쏟아졌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화물연대 파업과 관련해 ‘불법’과 ‘폭력’으로 규정했다. 학교 급식조리사들이 노동을 중단하고, 화물차들이 운송을 멈추고, 건강보험 고객센터 노동자들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지역난방 열배관을 점검하는 일이 중단됐다. 이러한 ‘물리적 타격’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폭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거꾸로 누가 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으로 규정하는지 그 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익’..
검찰에 출입할 때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급 이상 간부들이 기자들 군기를 잡는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 미운털이 박힌 기자를 제 방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건 약한 편에 속했다. 전화도 받지 않거나, 혹여 받더라도 모르쇠로 일관하면 기자는 ‘단독기사’는 고사하고 남이 쓴 기사도 받아쓰지 못하는 딱한 처지에 놓인다. 때로는 특정 기자의 태도를 문제 삼아 차장검사가 출입기자단과 정례적으로 하는 티타임을 중단하기도 했다. 티타임에서 듣는 말의 뉘앙스로 수사의 진행 상황을 가늠해야 하는 기자들에게 티타임 중단은 일종의 단체기합이었다. 검찰과 언론의 극단적인 정보 비대칭에서 가능한 군기잡기였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MBC에 취한 기이한 대응은 기존의 정치문법으로는 독해가 불가능하다. 특정 언론사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성남시의료원이 위기다. 2003년 성남시 원도심에 있던 종합병원 두 곳이 갑자기 없어지면서 생긴 의료공백 해소를 위해 두 차례에 걸친 주민 조례 발의 운동을 통해 힘들게 설립된 성남시의료원이다. 공공병원의 모범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받았지만 이러한 기대를 무너뜨리는 일이 계속 발생한다. 개원 준비를 하던 시기, 은수미 시장에 의해 초대원장이 사임한다. 병원 운영 방향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으로 보였다. 6개월 뒤에나 새 원장이 취임한다. 성남시의료원의 시범 진료 개시 두 달 만에, 코로나19 감염병 유행으로 인하여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지정되었고 3월로 예정된 개원식은 연기되었다. 많은 병상이 코로나19 격리병동이 되고 일반진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주민도 이용을 꺼리게 되었다. 올해에는 원장의..
이태원 참사, 이태원 블루가 된다 실패한 애도의 유령인 멜랑콜리가 죽어서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날이 올 때까지 멜랑콜리하자 멜랑콜리? 고대 그리스의 의학용어였다. ‘혼합한’ ‘검은’의 멜랑과 ‘담즙’의 콜리를 합친 ‘검은 담즙’을 뜻하는 말이자 동시에 이 검은 담즙의 과잉과 불균형이 유발하는 질병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오래 지속되는 두려움과 슬픔”으로 무기력해지는 증상을 멜랑콜리로 진단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멜랑콜리를 학문과 예술, 그리고 정치에서 탁월한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병으로 봤다. 병이지만 예민한 천재와 숭고한 영웅들의 성향이기도 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를 구별한다. 그에게 애도와 멜랑콜리는 리비도를 집중했던 대상의 상실이라는 동..
선명하게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다. 치과 대기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TV를 등지고 앉았는데, 맞은 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TV에 집중된 것을 깨달았다. 몸을 돌려보니 화면 속에서 커다란 배가 기울어지며 가라앉고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큰 배가?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라고? 어떡하지? 하지만 걱정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빨간 바탕에 커다란 흰색 글자, 탑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속보 자막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아유, 그럼 그렇지. 저 고등학생들, 오늘 저녁에 무용담 자랑 엄청나겠네. 그러고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현실을 알게 된 것은 치료를 마치고 지하철로 이동해 일터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8년 전 일이지만, 그 순간의 느낌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냥 ‘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