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앞세우자. 작년 말 교육부가 발표한 대학입시의 정시 비율 확대 정책은 적절하게 수정해야 한다. 정시 확대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국민 여론을 거듭 검토한 끝에 나온 결정이었다. 따라서 교육부는 그 결정에 담긴 타당한 취지를 더 나은 방법으로 대입제도에 반영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서울대는 기회균형 선발제도의 실질적 확대를 통해 자신의 위상에 맞는 역할을 다할 수 있다.대입제도 논란은 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의 공정성 시비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식 제도의 이식이라 할 학종이 가진 자에게 유리하다는 비판적 의식은 널리 퍼져 있었지만, (선정적 언론보도의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여론이 학종을 ‘금수저’ 전형으로서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는 사실에 대해 안이했던 면이 분명히 있었다.그러나 정시 비율..
온갖 원통한 죽음들과 죽음을 각오한 채 한없이 길어지고 있는 투쟁 소식들로, 2020년을 우울감 속에 시작하고 있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무력감에 한 차례 더 쑥 빠져들게 한 것은, 지난 15일 선감학원 피해자 이대준의 사망 소식이었다. 책 에는 이대준을 포함해 법적 근거도 없이 ‘부랑아’라는 이름으로 쓸어 담겨져, 어린 시절 선감도에서 뒤틀리기 시작해 평생 법망에 얽혀버린 피해생존자 9명의 생애 이야기가 구술되어 있다. 섬을 탈출하려다 죽어 바닷물에 퉁퉁 부은 채 떠내려온 어린 동료들을 자기 손으로 묻어야 했던 소년 이대준은 자신도 15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다. 그가 선감학원대책협의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자녀들과 그 배우자들을 선감학원 현장에 데리고 간 당당한 피해생존자였다는 것이, 죄송하..
초대형 고등어인가도 싶고, 앙증맞은 다랑어인가도 싶은 바닷물고기 방어의 계절이다. 방어는 일찍이 기록된 수산자원이다. 19년(1437) 기사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요긴한 수산자원으로 대구·연어·방어를 손꼽았다. 1670년경 쓰인 은 청어 백 마리에 소금 두 되를 뿌리고 땅에 묻어 삭히는 청어젓갈을 기록하면서 똑같이 담그는 방어젓갈을 부기했다. 조선의 박물학자 서유구(1764~1845)가 쓴 어류학서 에도 ‘방어’ 항목이 있다. 방어를 동해 특산으로 보되, 함경도에서부터 오늘날의 경상도 연안까지를 주산지로 꼽았다. 같은 책의 ‘멸치’ 항목도 재밌다. 이에 따르면 동해의 멸치가 방어에 쫓겨 엄청난 규모로 해안으로 몰려올 때엔 그 형세가 바람 불고 물결 이는 것과 같다. 어부는 이런 현상을 보고 방어가 온 줄 ..
주한미군사령부가 주한미군에 소속되어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오는 4월1일부로 무급휴직을 시행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올해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일찍 마무리되지 않으면 이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은 무급휴직 시 60일 전에 통보하는 절차를 밟는 것뿐이라고 했지만, ‘보도자료’를 통해 이런 방침을 알린 것은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한국인 노동자들을 볼모로 잡아서라도 더 많은 방위비를 받아내겠다는 미국의 발상이 참으로 치졸하다. 미국은 협상 초기 한국에 종전보다 5배나 많은 50억달러(약 5조8000억원)를 요구한 이래 한국을 줄곧 압박하고 있다. 양국 대표단이 그동안 협상을 통해 이견을 꽤 좁혔다고 하지만 미국은 지금도 분담금 증액의 기본 논리를 고집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 비상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29일 중국 내 신종 코로나 확진자는 6000여명으로 2003년 중국인 사스 환자 수를 넘어섰다. 가파른 사망자 증가세 역시 꺾일 기미가 없다. 독일·일본·베트남 등에서는 중국 체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신종 코로나 증상이 확인돼 2차 감염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지난 27일 4번째 환자 발생 이후 더 이상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 2차 감염자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다. 확진자들과 접촉한 사람들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유증상자들에 대한 검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본부는 국내에서 2차 감염자 발생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30일과 31일 중국 우한에 전세기를 투입해 교민..
지난해 설 연휴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과로사 소식이 알려진 것이 꼭 1년 전이다. 연휴기간 고향에 가기로 했지만, 밀려드는 업무에 퇴근도 못하고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채 발견된 그의 죽음에 온 국민이 망연자실했다. 올 설 연휴 직전엔 전국 17곳 권역외상센터와 닥터헬기 도입의 산파역을 했던 이국종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장(아주대병원 교수)이 사의를 표명했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이 교수는 지난 21일 라디오 방송에서 “이번 생은 망했다. 완전히”라며 “죽어도 한국에서 다시 이것(외상센터 일) 안 한다”고 했다. 깊은 절망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우리의 의료현실에선 보기 드물게, 명예와 출세도, 가족과의 시간도 포기한 채 험한 일이 기다리는 응급의료 개선에 인생을 걸겠다고 다짐한 의사들이었..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전염병은 ‘스페인 독감’이다. 1918년 창궐해 2년 만에 당시 세계 인구 16억명 중 6억명 이상이 감염되었고, 5000만~1억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1차 세계대전 참전국에서는 언론을 엄격히 통제하고 검열하던 상황이어서 중립국 스페인 언론만이 사태를 상세히 보도했다. 스페인 언론 덕분에 세계는 이 병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스페인 독감’으로 명명됐다. 진실 보도의 대가치고는 고약한 결과다.스페인 독감은 예외적인 사례다. 대개 유행성 질병은 첫 발생 지역의 이름을 따서 불렸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유행한 최초의 사례로 꼽히는 1833년 중앙아시아 독감을 필두로 1888년 중국 독감, 1957년 아시아 독감, 1968년 홍콩 독감, ..
명절이나 무슨 대소사에 기웃거리는 일에서 자유로워졌다. 세상에 남은 인연이 있다면 잔정을 느끼는 사이, 잔정을 나누는 사이뿐. 가령 물을 한 컵 달라고 하면 컵받침에 건네주는 손길이라든지, 어디 멀리 떠나는 여행길에 여비를 쥐여주는 거친 손의 친구에게 마음이 스민다. 그 친구를 위해 선물을 고를 때 가슴이 뛴다. 잔핏줄에 잔정이 돌아야 세상 살맛이 생겨난다. 중국도 시골로 갈수록 정이 많고 눈물이 많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도 술을 권하고 담배를 권한다. 어떤 할머니는 백세쯤 되어 보였는데, 길에서 쪼그려 담배를 권하는 이들을 보고 나무랐다. “어이 젊은이들. 담배가 무엇이 좋다고 여태 피우나. 나도 작년에 끊었다네.” 건너편 담벼락엔 정이 무척 많은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마침 정거장 곁이어서 담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