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종목 가운데는 ‘민주적인’ 스포츠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야구는 타석에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3개의 스트라이크만 허용된다. 때로 판정시비는 따르지만 삼진아웃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뒤끝이 깔끔한 편이다.사실 삼진아웃은 생활 곳곳에서 통용돼왔다. 음주운전이 일례다. 이전 도로교통법은 면허정지 수준인 혈중알코올농도 0.05% 이상~0.1% 미만으로 음주운전을 하다 3차례 적발되면 운전면허를 취소했다. 그러나 이 기준이 너무 관대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고 윤창호씨 사건을 계기로 음주운전 2차례만으로도 면허를 취소하는 ‘투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규정이 바뀌었다.허위·미끼 매물이 판을 치는 중고자동차 시장도 그렇다. 2016년 정부는 중고차 매매업체가 허위매물 등으로 3차례 적발되면 면허를 빼앗는..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법은 국가의 정체성을 밝혀 나아갈 방향을 큰 틀에서 제시하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당위의 가치가 담긴, 사람이 만든 법칙이 바로 우리가 얘기하는 ‘법’이다. 약하고 강한 징벌을 받을 수 있지만, 어쨌든 어기는 것이 가능은 하다. 어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면 우리는 법을 만들지 않는다. 자동차의 공중 비행을 규제하는 법을 만들 이유가 없다. 법이 필요한 이유는 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따르는 법칙은 다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어길 수는 없다. 손에서 가만히 놓은 물체가 땅을 향해 아래로 떨어진다는 자연법칙은 당위가 아닌 사실의 법칙이다. 내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생각만으로 돌을 위로 띄울 수는 없다. 사람이 만든 당위..
본가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유튜브를 배회했다. 김해까지 5시간 여정을 하다보면 스마트폰에 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개별 영상들은 5분, 10분 정도의 짧은 길이이지만 영상과 영상을 넘나들면 금방 시간이 사라진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주로 나의 관심사인 동물, 게임, 만화, 소설, 가요 등의 영상을 보여주는데 가끔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요즘 인기있는 영상이라며 관심사 바깥의 영상들을 추천할 때가 있다. 그사이에서 가장 빈도가 많은 것은 소위 ‘사이다’로 불리는 영상이다.‘사이다’는 ‘고구마’를 잔뜩 먹어 목이 메이고 답답한 상황을 청량하게 풀어주는 속 시원한 서사를 통칭해 이야기한다. 사이다 서사의 예시는 이렇다. 마음이 유약하고 순진해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선후배들의 등쌀에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
정제되지 않은 언어가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막말은 지위의 높고 낮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회 구석구석에서 터져 나온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12일 고양시 일산서구청에서 열린 신년회에서 일부 참가자가 고양시를 망쳤다고 여러 차례 항의하자 “동네 물이 많이 나빠졌네”라며 자질을 의심케 하는 발언을 했다. 또 15일에는 이문수 경기북부경찰청장이 탈모로 삭발한 직원에게 “왜 빡빡이로 밀었어? 혐오스럽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최근 기무사 문건으로 확인된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해경 간부들의 ‘세월호는 목돈 벌 좋은 기회’라는 폭언과 차명진 전 자유한국당 의원의 “세월호 유가족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처먹고, 찜 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고 진짜 ..
2005년 영화 을 보러간 관객은 소리도 영상도 없는 검은 스크린을 수분간 견딘 뒤에야 본편을 볼 수 있었다. 대통령 박정희의 마지막 하루를 그린 이 영화에 대해 아들 박지만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법원이 이를 일부 받아들여 특정 장면의 삭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재판부가 문제 삼은 것은 영화의 프롤로그인 1979년 10월 부마항쟁 자료화면, 에필로그인 박정희의 장례식 자료화면이었다. 재판부는 을 열고 닫는 다큐멘터리 화면 때문에 관객이 영화 전체를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으로 오인할 수 있다고 봤다. 백윤식이 김재규, 송재호가 박정희, 김윤아가 심수봉을 연기하는데도 “실제라는 인식을 심어줄 소지가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보수세력의 비난은 더욱 극심했다. 마치 이 신성모독이라도 저지..
어느 고등학교에서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손을 번쩍 든 학생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의 대답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기차게 달리는 이유가 이토록 명백하다는 것을,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유전자를 가졌다는 인간의 목표가 이토록 단순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사실이니까. 대한민국에서는 더 나아가 서울 한복판에서 점심시간에 목에 사원증을 걸고 테이크아웃 커피 컵을 들고 다니는 걸 ‘꿈’이라고 한다. 용케 꿈을 이룬 이들은 행복할까? 10년간 대기업에서 충실하게 일한 이는 어느 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회사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어린 시절 신기하게 여겼던 시계를 직접 만들어보기로 마음먹고, 주말마다 종로에 있는 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의 이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위험사회란 위험이 사회의 중심 현상이 되는 사회를 말한다. 벡은 위험사회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위험은 전염성이 강하다. 둘째, 위험은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 셋째, 과학의 발전에 비례해 위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다. 넷째, ‘안전’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중요해진다. 다섯째, 시민들의 불안이 증가함에 따라 안전은 물이나 전기처럼 공적으로 생산되는 소비재가 된다.위험사회론이 이전 시대보다 현대사회가 더 위험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벡이 전하려는 것은 우리 인류가 직면한 위험의 현재적 성격이 과거와 다르다는 점이다. 현대사회 이전의 오래된 위험은 자연재해와 전쟁 등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새로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올해 사업이 잘되었다지?” “건강이 더 좋아졌다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축하하는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 말하는 데에 돈 드는 것 아니니 부담 없이 하게 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더욱 간편하게 전할 수 있다. 주는 것 없이 받으라 하고, 받은 것 없어도 기분 좋은 것이 덕담이다.사실 복은 사람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축복(祝福)과 신(神)의 한자에 제단(祭壇)의 모양을 본뜬 기(示)가 공통으로 들어간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복은 본디 초자연적 존재와 연관된다. 한 해 내내 반복되어 온 일상의 고리를 잠시나마 끊고, 새해에는 사람의 의지만으로 잘 안되던 일들까지 술술 풀리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건네는 말이 덕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