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소설이 있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좀비 영화 의 원작으로 맥스 브룩스의 작품이다. 어느 날 좀비 바이러스가 출현을 하고 세계와 인류가 존재의 운명을 걸고 그 바이러스와 맞서 싸운다는 내용은 소설과 영화가 다를 바 없다. 다만 소설은 영화와 달리 좀 특별한 구성과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서사의 기승전결을 인터뷰로 모두 채웠다는 점이 그렇다. 소설은 바이러스 사태가 모두 종식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어 원작에는 부제 자체가 ‘구전하는 좀비 전쟁의 이야기’로 되어 있기도 하다. 화자는 유엔의 전후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좀비 전쟁의 실태 조사가 그 임무인 바, 우리는 ‘인간적인 요소’에 가려지지 않은 분명한 사실과 수치를 원한다는 위원장의 말에 반하여 이렇게 응답한다. ‘하지만 이 ..
지난달 23일 코로나19 위기경보가 ‘심각’으로 격상된 이후, 방역당국과 전문가의 한목소리를 타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핵심 전략으로 등장했다. 대형 종교·기업·교육기관이 포문을 열고, 중앙과 지방정부가 지원책을 공급하고, 시민사회가 동참하며 성과가 이어졌다. 그러나 모두가 고대한 상황, 즉 확진자가 줄고 사흘째 완치자가 신규 확진자를 앞지르게 되자 현 상황에 맞는 사회적 거리두기 동력을 챙기는 도전이 시작된 것 같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확진자 폭증 때만 잠시 쓰고 폐기하는 전략이 아니고, 학교·직장의 ‘일상 셧다운’ 형태의 초강력 사회적 거리두기는 무한정 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헌과 조사결과를 종합해보면, 우선 사회적 거리두기 그 자체를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방역 전문가에게는 교과서..
“너! 고소.” 몇 년 전 어느 변호사가 사무소 인근에 붙인 포스터의 광고 문구다. 고소는 범죄의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가해자를 처벌해 달라고 고하는 행위다. 고소권 없는 사람이 처벌을 바라며 고하는 행위는 고발이다.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고소 건수는 연간 55만건쯤 된다. 일본의 경우 대략 1만건인 데 비하면, 절대수로 50배이고 인구비를 감안하면 100배를 상회한다. 공직자와 공조직도 고소 대열에 끼어 있다. 검찰총장이 신문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민간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정당 대표가 칼럼을 쓴 교수와 이것을 게재한 신문사를 고발한다. 고소는 일단 고소한 사람을 피해자로 만들고 고소당한 사람을 가해자로 만든다. 이 구도에서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형사사법의..
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1번째 확진자’ ‘3번째 확진자’ ‘5번째 확진자’….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 초기에 ‘1번 환자’ ‘3번 환자’라고 불렀다가 마치 수감번호를 매기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지적에 따라 ‘1번째 확진자’로 표기를 바꿨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째’를 넣고 안 넣고가 큰 차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은 아마도 문법적 형식을 알리바이 삼은, 작은 자기위안에 불과할 것이다. 표현을 어떻게 바꾼다 한들 사람을 숫자로 기록하는 것은 폭력적인 행위이다. 번호표가 붙는 순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에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는 단지 국내에서 몇 번째로 바이러스 보유자임을 확인받았는지만이 의미가 있는, ‘감염자’로서의 존재로만 기록에 남..
균형발전은 국가의 의무이고 권리다. “국가는 지역 간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지닌다.”(헌법 제123조 2항), “국가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하여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헌법 제122조) 이러한 헌법 정신에 따라 역대정부는 균형발전정책을 이어왔다. 권위주의 정권의 개발시대에는 ‘균형’보다 ‘발전’이 중시되었다. 국토를 고루 키우는 대신 성장거점을 집중 육성했다. 거점을 키우면 그 효과가 주변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이론은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경부축과 비경부축,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도시와 중소도시,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커졌다.민주화 이후 국가정책의 중점이 ‘발전’에서 ‘균형’으로 옮겨졌다. 김영삼 정부는 지역균형발전과 지방중소..
‘기후변화’가 미국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를 처음 장식한 때가 1988년 6월24일(현지시간)이다. 제목은 ‘지구온난화는 시작됐다, 전문가 상원에서 말하다’였다. 미국 항공우주국의 제임스 핸슨 박사는 전날 미 상원에서 “지구온난화가 이산화탄소와 다른 온실가스에 의해 강화된다고 99% 확신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은 대중들에게 지구온난화·기후변화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그 피해가 미래세대의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경종이었다. 하지만 정부를 움직이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15년은 기후변화의 또 다른 이정표가 세워진 해였다. 그해 12월에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됐다. 195개국이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합의했다. 기후변화 ..
하루 식전엔 누가 대문 밖을 서성거리기에 문 빼꼼 열고 봤더니 그 눈치 없는 것, 봉두난발에 흙발로 샐쭉 깡통 내밀데요 언제 동네를 한바퀴 돌았는지 흰쌀에 노랑 조, 분홍 수수, 자주 팥 없는 것이 없는데 그냥 보내기 뭣해서 보리 싹 한줌 얹어주었지요 고것이 인사도 없이 뒤꿈치를 튀기며 가는데 멀어질수록 들판은 무거워지고 하늘은 둥둥 가벼워지고 먼 개울가에선 버들강아지 눈 틔우는 소리 들려왔어요 참 염치도 없지, 몽당숟갈 하나 들고 따라가고 싶더라니까요이정훈(1967~) 이 시에서는 구걸을 하러 온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의 추레한 행색보다는 그가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얻어온 것들에 시선이 쏠리는 이유는 뭘까. 흰쌀과 조와 수수와 팥 그리고 보리 싹 한 줌에 눈길이 먼저 가는 것은 아마도 파종을 하는 봄이 ..
다들 저마다 과거로의 퇴행을 막기 위해 선거 전망과 다양한 비례위성정당 제안을 내놓았다. 난 이 곤혹스러운 고민이 가지는 절실함과 진정성을 믿는다. 다만 그중 일부 논객들은 과거 조국, 지소미아, 코로나19 사태에서 일관되게 일주일 앞도 못 내다본 걸 기억한다. 이분들이 스스로 가장 자랑하는 게 정치 윤리가 아니라 정치 현실주의라는 게 나에겐 기이한 퍼즐이다. 왜냐하면 자주 현실 예측에 실패하는 현실주의는 금시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떡하든 정치연합을 확대하려 하기보다는 비생산적으로 감정을 건드리고 진보정당의 핵심 지역구 기반을 위협하는 등 정치연합을 축소하는 데 매진하는 건 현실주의가 아니다. 이번엔 이들의 수학적 시뮬레이션 능력이 맞을 것이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의 균열이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