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경극의 독특한 얼굴 화장을 화검이나 검보라고 한다. 그런데 화검은 ‘상처 자국 또는 반점이 있는 얼굴’을 뜻하는 화면(花面)이라는 단어와 같이 쓰인다. 화면은 곧이곧대로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러나 반어적으로도 쓰이는데 에 보면 ‘천연두가 심하여 얼굴에 마맛자국이 생긴 것을 일컫는다’고 되어 있다. 원나라 사람들 중 불화(不花)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유난히 많은데 불화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꽃이 피지 않는 장소가 화단이나 정원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이의 얼굴이다. 천연두를 많이 앓았던 원나라와 금나라 사람들이 이름 자체에 부적의 의미를 담아 화면이 되지 않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천연두가 창궐했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역병의 시대를 어떻게 넘겼을까. 당시는 지금처럼 한..
2018년 7월 국민연금이 수탁자책임원칙(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선언한 이후 더 적극적인 주주 권한 행사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올해 주총부터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의 본질과 절차에 대한 오해로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비판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 반대하는 측이 내세우는 가장 큰 논거는 대부분의 주요 기업에서 대주주 지위를 점하고 있는 국민연금이 독립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정부 또는 일부 이해관계자 집단의 영향력에 좌우되어 왜곡된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 타당성을 따져보기 위해선 먼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관련 의사결정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
손꼽아 세어보니 열 번이 넘는다. 아파트 출입문을 열 때 여섯 번, 집 안으로 들어설 때 또 여섯 번 번호판을 눌러야 한다. 2층에 살아서 엘리베이터 버튼에 손대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배달음식이나 택배가 오면 또 긴장한다. 배달하는 분이 마스크를 썼는지 즉각 확인하고 얼른 물건을 받아드는데 그때마다 손잡이 부분이 신경 쓰인다.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예민해진다. 손잡이를 잡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코로나19 사태가 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일상적 삶은 다름 아닌 손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엄연한 사실을 절감한다. 사회생활이란 수많은 문을 드나드는 것이고, 그 문은 매번 손을 써야 여닫을 수 있다. 과학기술이 진전하면서 손의 역할은 크게 줄었지만, 손이 하는 일은 여전히..
코로나19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TV 시청 시간이 늘어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뉴스를 찾아보게 된다. 밤사이 확진자 추이와 일별 확진자 수는 어떤지, 유럽과 미국 등 세계 각국의 상황은 어떤지, 경제활동 등 삶의 조건들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불안과 두려운 마음으로 자꾸 뉴스를 보게 된다. 우리의 생존과 안전이라는 당면한 과제 앞에 각종 리얼리티 예능은 그 관심과 흥미가 후순위로 밀리게 되는 것 같다. 정말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눈앞에 매일 펼쳐지고 있는데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그래도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주는 것은 이웃들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마스크를 모아 파출소 입구에 두고 간 장애인의 기사를 보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고, 코로나19로 기다..
거울을 잘 보지 않던 아이가 문득 몹시 골똘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서는 날이 있다. 10대들의 교실에서 글쓰기 교사로 일하다 보면 그런 순간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든 별 관심 없던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이는 이제 자의식의 축복과 저주 속에서 한층 더 복잡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내 모습과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신경 쓰며, 내가 바라는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괴리를 수없이 느끼며 자라날 것이다. 누구도 그 변화를 늦추거나 멈출 수 없다. 글쓰기 교사인 나는 아이가 자기 몸을 최대한 덜 미워하기를 혹은 아무래도 좋다고 느끼기를 소망하며 수업을 진행한다. 거울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자주 건네는 건 몸의 느낌에 관한 질문이다. 지난주의 키와 이번 주..
전국 곳곳에서 개화 소식이 들린다. 이제 곧 개나리도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노란 꽃잎이 화사한 개나리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든다. 하지만 이름만 놓고 보면 참 못난 꽃이다. 우리말에서 접두사 ‘개’는 ‘야생 상태의’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 등의 뜻을 나타낸다. ‘개나리’도 백합 같은 나리꽃 가운데 가장 질이 떨어진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처럼 나쁜 의미의 ‘개’와 대립하는 말은 ‘진’이다. ‘들에 피는 달래보다 더 좋은 꽃’이 ‘진달래’다.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진달래는 ‘참꽃’으로도 불린다.진달래와 함께 우리 산과 들을 붉게 물들이는 꽃으로 흔히 ‘연산홍’으로 불리는 것도 있다. 하지만 ‘연산홍’은 잘못된 이름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이 꽃이 ‘영산홍(연산홍)’으로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들끓고 있다. 취약한 처지의 여성들을 협박해 성착취 동영상을 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후폭풍이다. 23일 오후 7시 현재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 청원에 235만여명이 동의했다. 역대 최다 기록이다.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원합니다’에도 165만여명이 동참했다. 합쳐서 400만명을 넘어섰다.텔레그램은 보안성이 강한 모바일 메신저다. 성착취 범죄자들은 이곳에 비밀 대화방을 개설하고 영상물을 유포했다. ‘갓갓’이라는 운영자(미체포)가 1~8번 대화방을 운영하며 ‘n번방 사건’이란 명칭이 생겼다. 이후 유사 대화방이 여러 개 등장했는데, ‘박사’라 불린 20대 조모씨가 만든 ‘박사방’이 가장 악질로 꼽혀왔다. 박사방의 실체..
멀리 꽃산행 가서 아침을 때울 때 콩나물국밥은 흔한 메뉴 중의 하나다. 지역색이 물씬한 식당들은 그릇도 다르고 맛도 다르지만 가격은 비슷하고 모두 콩나물을 듬뿍 넣어준다. 구례공영버스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첫 국물을 뜨자 혀가 장구를 쳤다. 이제껏 먹은 것 중 최고라고 덕담을 건넸더니 뿌듯한 기분을 감추지 않으셨다. 그 바람에 덩달아 즐거워지며 맛에 풍미가 더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소라도 되어 우둑우둑 여물 씹는 기분으로 먹으면 더욱 좋아지는 콩나물국밥. 이번에도 턱밑에서 워낭소리 울리며 마지막 국물까지 핥아먹었다.순천 외곽의 상검마을을 지날 때 그간 잊고 지냈으나 내 기억의 골짜기에 오래 달착지근하게 붙어 있던 냄새가 났다. 그것은 마을 끝에 있는 축사에서 소와 송아지 일가가 나에게 한 움큼 선물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