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구하러 다녔다. 원칙은 이랬다. 월세가 아니라 전세여야 할 것. 안전과 위생이 보장될 것. 그뿐이었다. 욕심은 없었다. 조그마한 오피스텔 정도면 살 만하지 않을까. 틈만 나면 부동산정보 사이트를 드나들며 탐색하고 연락처를 남기며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욕심이었다. 손에 쥔 돈으로 서울시내 웬만한 오피스텔은 운도 뗄 수 없는 경지. 기대와 절망의 연속. 욕심은 없다면서 작은 바람은 어찌나 많은지. 이왕이면 좋을 것과 이것만은 안될 것의 팽팽한 줄다리기. 그 와중에 기생충이 될 수 없다며 반지하가 떨어져 나가고, 사무실과 다가구가 날아가고, 선택의 여지는 그렇게 옥탑을 향해 한없이 올라가고 있었는데, 드디어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익숙한 동네에(실은 단골술집에서 아주 가까운), 북한산을 조망할 수..
제주 성산에 사는 ㄱ씨는 자신의 집이 제2공항 사업 예정지로 편입된 사실을 어느 날 저녁 뉴스를 보고 알았다. 현 제주공항의 관제시설을 개선하고 보조활주로를 활용하면 ‘제2공항은 필요 없다’는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 보고서는 은폐되었다. 제2공항 사업 근거인 2045년 항공여객 수요는 ‘사전타당성 검토’ 4560만명, ‘예비타당성 보고서’ 4042만명, ‘기본계획 용역’ 3890만명으로 일관성이 없었다. 애초 잘못된 수요예측으로 제2공항 사업을 설계한 것이다. 국토교통부는 지역주민 460명이 서명해 요구한 전략환경영향평가서 협의 의견 공개를 거부했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은 ‘입지적 타당성이 매우 낮은 계획’ ‘갈등 해소와 주민 수용성 우선 확보’ ‘합동 현지조사’ 등을 요구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집 앞..
재작년부터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카를 마르크스의 에 관한 책을 두 달에 한 권씩 2년간 펴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두꺼운 책은 아니지만 언제나 원고 마감이 코앞에 있는지라 시간을 아껴야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일정표가 깨끗해졌다. 아무것도 채워 넣을 수 없으니 텅 빈 일정표가 꽉 찬 일정표인 셈이다.집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다. 가족들과 밥을 먹고 휴식하는 시간을 빼고는 방에서 혼자 글을 쓰거나 자료를 정리한다. 답답하면 산책을 하고 잠시 동네 카페에도 들르지만, 대체로 혼자 걷고 혼자 커피를 마신다.처음에는 이런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싶었다. 워낙에 사람들과 어울려 수다 떠는 걸 좋아했고 산책도 우르르 몰려다니곤 했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졌다. 고요함에 ..
요즘은 코로나19로 일상이 시작된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공기 같은 두려움을 마주한다. 나와 똑같이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함께 길을 걷는다. 나도 모르게 나온 기침에 내가 놀라 주변을 돌아본다. 사람들이 놀라진 않았을까.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내게 열은 없는지, 어제 방문한 곳이 위험하진 않았는지. 안전하지 않다는 감각은 주변을 경계하게 한다.위기가 지나가기까지 마음 편하게 일상을 멈춰뒀다가, 위험이 싹 사라진 다음에 일상을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하지만 삶은 그런 식으로 멈추어지지 않는다. 먹고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집을 나선다. 보통의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할 뿐이다. 스스로 감염을 조심하고 주변을 돌보며 말이다.모두의 근심이 커..
어목연석(魚目燕石)이라는 말이 있다. 물고기의 눈과 중국 연산(燕山)에서 나는 돌은 모두 옥(玉)과 비슷하지만 옥이 아니라는 뜻으로, 진짜와 비슷하지만 본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주 한전의 2019년 결산실적이 나오자 ‘탈원전=한전 적자’라는 잘못된 주장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보며, 에너지전환의 본질이 가려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사실 본격적인 ‘탈원전’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2017년 23GW이던 원전 설비용량은 2024년이 되면 27GW까지 늘어난다. 이 기간 중 문을 닫는 원전은 3GW에 불과한 반면, 새로 문을 여는 원전은 7GW에 달하기 때문이다. 2016년 이후 원전이용률이 하락했던 이유는 과거 건설된 일부 원전에서 콘크리트 공극 등이 발견되어 국민의 안전을..
일상에 지치면 스스로 격리되어 며칠 푹 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몸이 아파 격리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코로나 때문에 ‘격리’라는 단어가 신문과 방송에 자주 등장한다. 내 삶과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당혹스러운 일이다. 평생 격리되어 생활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격리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정확히 모르지만, 적어도 격리라는 단어가 코로나에 걸리면 국가가 나를 안전하게 책임져 주겠다는 뜻으로 들리진 않는다. 오히려 몸이 아픈데 고립시켜 이중고를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증상이 있더라도 죽기야 하겠어라며,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기를 주저할 수도 있다. 확진만큼 격리도 무섭게 느껴진다.온몸을 밀봉한 4명의 의료진이 한 조가 되어 투명비닐 백에 넣은 확진자를 구급차에서 내리는 영상뉴스..
대구에 있는 고교 선생님의 안부가 걱정됐다. “기침 때문에 걱정했지만 감기라네. 괜찮아. 난 고립에 익숙한 편이라….”선생님은 포항에서 교육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뒤 33년 전 고향 대구에 정착했다. 삶의 고통을 잊으려 다시 찾은 고향, 살아내기 위해 겪었던 모든 경험이 고립이었으리라. 선생님은 그때마다 낙동강 발원지 황지를 출발해 황톳길 긴 방죽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잊지 않기 위해.코로나19가 대구를 휘감고 있다. 2월29일 현재 대구 지역 확진자만 2000명이 넘었다. 선생님의 고립은 예전과는 달랐다. 그간 홀로 겪었던 고립을, 이번엔 대구 시민들과 함께 겪고 있다. 선생님은 악몽이라고 했다. 악몽의 실체는 혐오를 따라 창궐하는 정치 바이러스였다. 2월18일 31번째 확진자가 발생한 ..
아직 제가 태어나지 않은 것 같은 표정으로몸이 생겼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눈으로유모차에 앉아 있던 아기가 내 눈과 마주친다, 순간아기가 다칠 것 같다내 눈빛에서 튀어나가는 이빨과 발톱을어떻게 눈알에 붙들어 매야 하나 난감하다 자신을 방어할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아기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끊임없이 뭔가를 방어하고 있던 내 두려움도아기 앞에서 다 들켜버린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관절이 연약해지며내 안에서 조용히 무릎 꿇는 것이 있다혀에 가득한 말들은 발음을 잃고표정은 얼굴로 가서 입 벌리고 멍해진다 김기택(1957~) 유모차에 앉아 있는 아기와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시인은 덜컥 겁이 난다. 자신의 눈빛에는 이빨과 발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눈빛에는 거칠고 사납고 치려는 기세가 있기 때문에. 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