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긴장과 단절, 공포가 일상화하면서 개인 삶도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전염병은 경제·사회 시스템과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원·달러 환율은 폭등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급여가 줄고 실업자들은 늘고 있다. 정부가 그렇게 잡으려고 했던 강남 아파트 가격도 상승세가 꺾였다. 그런 코로나19도 한국 사회 만악의 뿌리인 사교육에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다. 집단감염 우려로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학원은 학생들로 다시 붐비고 있다. 서울은 이달 중순만 해도 학원 10곳 중 3~4곳이 쉬었지만 대부분 다시 문을 열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고, 공급이 또다시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대치동과 목동의..
관광 그러니까 시각적 쾌락을 목적으로 타인의 무덤에 가본 적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나에게 무덤이란 국립묘지처럼 ‘참배’하거나, 부모님의 묘소처럼 ‘애도’하는 곳이었다. 관광객으로 나폴리에 오니 감히 무덤을 구경하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관광 안내 책자에서 구한 나폴리의 ‘볼거리’ 정보에 따라 카타콤, 즉 지하무덤을 구경하기로 했다.개별 관광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사전 예약을 해야 하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서만 구경할 수 있다. 예약을 대행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카타콤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폴리 지하의 산 제나로 카타콤을 탐험하세요! 나폴리 수호성인 산 제나로와 도시 간 끈끈한 유대감에 대해서도 알아보세요!” 이 초대장은 카타콤을 다소 경쾌하게 소개하며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혹시라도 지하무..
물리적 거리 두기를 위해 사람과의 만남을 가능한 한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렇게 살 수만은 없다. 그래서 화상회의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온라인 모임을 했다. 일요일 밤 10시, 약속한 시간에 화상회의 채팅창에 접속하자 친구들의 일상 풍경들이 분할돼 한 화면에 펼쳐졌다. 한 친구는 안 자고 더 논다고 버티는 아이를 막 재우고 나왔다. ‘평화롭게 잠든 아이를 보는 부모의 고단한 기쁨’이 무언지 맥주 캔을 따는 친구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금주를 결심한 친구였고 그것은 맛없는 무알코올 맥주였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한 친구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김치찌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양파가 없어서 부엌 안을 방황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 친구는 반려동물과 산책하고 돌아왔다. 이런 상황이 ..
아동학대로 인해 아동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고 들려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아동학대 근절을 위해 각계각층이 해 왔던 부단한 노력도 아이의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침통함을 금할 수 없다.그동안 아동학대에 대한 조사와 사례관리는 공공이 아닌 민간 사회복지법인에 의해 운영되는 아동보호전문기관이 담당해 왔다. 아동 보호에 대한 신념과 열정, 전문성을 겸비한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은 일선 현장에서 아동학대 행위자의 폭언과 폭행 및 가용자원의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아동들을 학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하지만 민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아동학대 행위자가 문을 걸어 잠그고 개입을 끝까지 거부하면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곤 했다. 그로 인한 보호의 공백 속에서..
한국이 코로나19 사태 통제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신천지발’ 환자의 급속 확산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적극적인 대처로 진정 국면에 접어든 덕이다. 해외로부터 드라이브 스루 등 ‘한국 모델’의 노하우 전수 요청도 잇따른다. 한국의 성과는 정부의 발 빠른 대처와 헌신적인 의료진, 성숙한 시민사회가 어우러진 결과다. 감염 정보를 숨김없이 공개해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의 신뢰를 끌어냈고, 이는 시민의 적극적인 정책 참여로 이어졌다. 그러나 방역 인력 및 시스템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면 코로나19 기세를 누그러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량 검사만 해도 숙련된 인력과 복잡한 위생 설비 및 검사 재료가 확보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느 날 필요성을 느낀 지도자가 “합시다”라고 외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의 ..
공자(孔子)가 자신의 도가 하나로 꿰어져 있다고 말하자 증삼(曾參)은 그것이 충(忠)과 서(恕)를 가리키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서(恕)는 공자가 자공(子貢)에게 평생의 좌우명으로 준 글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일상에서 활용되는 어휘가 ‘용서(容恕)’밖에 없을 정도로 서(恕)는 사라져 가는 글자가 되고 말았다. 서(恕)는 남의 마음도 나와 같으리라는 점을 헤아려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상대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덮어 준다는 ‘용서’의 현대적 의미보다 훨씬 외연이 큰 말이다.용서를 미덕으로 강조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한, 용서를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명령은 인간이 ..
아픈 어머니가 집에 계신다. 얼마 전 산소공급기에 문제가 생겼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출장 수리가 안된다고 한다. 또 큰 병원 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하필이면 추천받은 병원에서 확진자가 대거 발생했다. 전국 요양병원이 전수조사 중인 가운데 집에 모셔 다행이다 싶었지만 우리집도 이 역병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멀리 있던 공포가 점차 내 집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다. 역병의 위험을 비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질병도 위험하지만 더 큰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다. 실내체육시설과 유흥업소 등에 운영 중단 권고가 내려졌고 장사가 안돼 자진 휴업하거나 폐업하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10만명의 학교 비정규직은 개학 연기로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됐고, 여행이나 관광운수업 등에서는 무급휴직에 이어 정리해..
‘온라인 페르소나를 만들려 하던 초창기부터 나는, 가상의 남자가 되는 게 가상의 여자가 되는 것보다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28년 전, 게임 연구를 통해 온라인시대의 자아정체성 문제를 탐구하고자 했던 MIT의 심리학자 셰리 터클은 연구 현장인 게임으로 뛰어들기 전 이런 고민을 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역할놀이 게임 세계에서 여자는 남자로, 남자는 여자로 혹은 중성의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고를 수 있었다. 성역할 바꾸기를 통해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성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연구결과를 정리한 터클의 책 은 온라인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실제세계와는 달리 다중의 정체성을 경영하며 때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스스로에게 숨 쉴 틈을 주고, 때로는 현실에 저항할 힘을 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