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흥미진진한 영화들을 쏟아내던 극장가에는 신작이 사라졌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작 흑백판의 개봉은 연기됐다. 공공 미술관과 박물관도 문을 닫았다. 평소 즐겨 들르던 직장 근처 박물관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도 없게 됐다. 최근 인기가 급상승한 여자 배구는 무관중 경기로 치러지다가 결국 리그가 중단됐다. 텔레비전 중계로 본 마지막 경기에서는 따라부르는 이 없는 응원가만이 텅 빈 체육관을 울렸다. 한국 천주교는 전국 1750여개 성당의 주일미사를 온라인, 개별 미사로 봉헌하고 있다.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중국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 이래 236년 만의 일이다. 지난해만 해도 광화문과 서초동에 수십만명이 수시로 모이던 사회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낯선 권고안이 들린다. 직장 동료..
지난달 27일 한국마사회 비리를 유서에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문중원 기수의 추모공간이 강제로 철거됐다. 고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유족과 시민들은 정부서울청사 앞에 빈소와 추모공간을 마련했다. 매일 저녁 추모 문화제를 열어 마사회, 그리고 마사회를 관리·감독하는 정부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고인이 사망한 지 91일, 고인의 시신이 정부서울청사 앞에 놓여진 지 63일 만에 정부가 답을 했다. 유족과 시민들이 기대했던 답은 아니었다. 700여 명에 이르는 용역과 경찰들을 동원한 추모공간의 강제철거가 그 답이었다. 추모공간을 지키던 시민들은 용역에게 하나둘씩 끌려나갔다. 여성의 웃옷과 바지가 벗겨질 정도였고, 목사님은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을 일으켰다.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
지난 주말 한강 변에는 가족 단위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모임은 취소되고 체육관, 식당, 극장, 쇼핑센터, 찜질방에 가기는 겁나고 집 안에만 있자니 답답해서 나온 것이리라. 평소라면 모이기 힘든 조합의 가족 구성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한강을 따라 함께 걷고 있는 풍경은 낯설었다. 식료품 가게에 가자 매대가 텅 비어 있었다. 가족들이 계속 집에만 있어서 밥해 먹기 바쁘다고 앞에서 계산하시던 분이 한탄했다. 재택근무 중인 친구는 고양이랑 계속 같이 있어서 좋지만, 출근해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한탄했다. 프리랜서 친구 부부는 어린이집 휴원으로 작업을 중단하고 교대로 아이와 놀아주고 있다. 비슷한 처지의 부모들이 많아 아파트 놀이터에서 처음 보는 가족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며 일종의 공동육아를 했다고 한..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은 정치를 싸움으로 본다. 선한 자신들은 소수인 데 비해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검찰, 악 그 자체인 미래통합당 등등,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은 극도로 좋지 않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거악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는 게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명.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안을 내 편과 네 편 간 치열한 전투로 승화시킨다.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금기 사항. 현 정부가 유난히 사과에 인색한 것도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해가 간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광우병 시위 때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억지로 눈물을 짜내면서까지 사과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마스크 관련 사과를 제외하면, 국민에게..
지난 2월11일 일본 NHK 뉴스에 의하면, 전날 일본 경제산업성 소위원회는 후쿠시마 사고 원전에서 배출되어 누적되고 있는 삼중수소 등을 포함한 오염수 처분방법으로 해양방출을 추천하는 내용의 정식 보고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 이에 근거하여 경제산업성은 지역 관계자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 해양방출 시기 등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방침이다.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해양방출에 대하여 후쿠시마현과 이웃한 이바라키현 지사는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일본 어업계도 어업 피해 때문에 반대를 표명하고 있으며, 일본 유권자 절반 이상도 반대한다는 것이 최근 여론조사 결과다.국내에서도 지난달 14일 시민환경단체들로 구성된 탈핵시민행동이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에 방사능 오염수 해양방출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현재 사..
나는 코로나바이러스다. 다들 나를 원망하지만 당치 않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을 숙주 삼아 생존하려고 할 뿐이다. 내가 발이 있나 손이 있나. 인간이 아니면 단 1㎜도 이동할 수 없다. 자기들이 옮겨놓고 내 탓을 하니 어처구니없다. 나더러 인간의 약점과 빈틈을 파고든다고 한다. 그건 인간의 언어일 뿐이다. 생명체가 보다 살기 좋은 곳을 선호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나는 한국이 참 좋다. 사실 중국은 더 좋았다. 인구가 많은 데다, 여론통제와 진실 은폐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나아가 천적이나 마찬가지인 리원량 같은 의사를 알아서 물리쳐주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다. 도쿄 올림픽 때문인지 방역에 소홀한 일본, 검사 한 번에 100만원씩이나 하는 미국도 나쁘지 않다. 애초 한국은 내가 ..
항공산업 종사자가 아니라면 항공기의 부품 중 램 에어 터빈(ram air turbine·사진)을 보거나 그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램 에어 터빈은 항공기의 동력계통이 작동하지 않는 비상상황에서만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항공기는 조종과 통신, 항법, 조명, 공기조화를 위해 전력을 필요로 한다. 항공기에서 쓰는 전력은 메인 엔진과 동체 끝에 보조동력장치(auxiliary power unit)에서 나온다.그런데 인간이 만든 기계는 언제든 고장이 나서 작동을 멈출 수 있다. 램 에어 터빈은 그때 최소한의 전력을 만들어내는 최후의 장치이다. 아주 간단한 장치인데, 평소에는 동체 속에 숨어 있다가 비상시가 되면 작은 프로펠러가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항공기의 엔진이 꺼져도 한동안은 활강..
갑작스러운 코로나19의 침입은 마치 전쟁처럼 한국 사회를 불안감에 빠뜨리고 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에서 한국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가에 대해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에도 바이러스 대응 과정에서 예외 없이 나타난 정치화 현상은 어려운 한국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런데 백신도 없는 역병이 발생했을 때의 불안과 걱정 및 혼란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아직 감염률이 낮은 편인데도 사재기 열풍이 불고 있고, 특히 마스크는 대형 마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항상 그러했듯이 상호 비방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익숙한 한국 사회는 이번 위기도 그럭저럭 나름대로 극복할 것으로 예상된다.보다 근본적 문제는 이번 사태의 극복과정에서도 여전히 한국의 고질병인 관료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