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화폐는 대부분 ‘엽전’이었다. 그런 까닭에 사극에서 자주 엽전이 등장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도 엽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안다. 하지만 엽전의 의미를 아는 이들은 드물고, 엽전과 관련해 잘못 쓰는 말은 많다. 엽전은 ‘잎 엽(葉)’과 ‘돈 전(錢)’으로 이뤄진 말로, 한자의 의미만 놓고 보면 ‘잎사귀 돈’이다. 유용하게 쓰이는 잎사귀도 있지만, 대개의 잎사귀는 쓸모없이 버려진다는 점에서 ‘잎사귀 돈’은 좀 생뚱맞다. 그다지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엽전은 어떤 의미를 담은 말이 아니라 그것을 제작하는 과정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엽전은 금속활자를 만드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동전 모양이 있는 틀에 쇳물을 부은 후 이것이 식으면 하나씩 떼어내고 연마해서..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 인근의 한 상점에 30일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휴업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119신고 후 2분 만에 구조대원들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초동 구조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좁은 골목길에 옴짝달싹할 틈도 없이 들어찬 인파를 헤쳐나갈 수 없었다. 사방에서 구해달라, 살려달라는 비명과 울음이 터져나왔다. 목격자들은 사람들이 계속 밀리고 버티고 깔리는 상황이 1시간 넘게 이어졌다고 했다. 결국, 지난 29일 밤 이태원은 축제를 즐기러 나온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고 다친 참사의 현장이 됐다. 시민 다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로를 도왔다. 자발적으로 손을 뻗고 팔을 걷어붙여 인명 구조에 나섰다. 구조대가 오기 전부터 길에 떠밀려가던 사람들의 손을 잡아 난간 위로 끌..
월드시리즈 개막을 하루 앞둔 27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경기장의 전광판에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팀 로고가 띄워져 있다. EPA 연합뉴스 미국 필라델피아는 정치·경제적으로 역사가 깊은 도시다.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미국이 1776년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곳이다. 미 제헌의회가 열렸고, 워싱턴으로 옮기기 전 10년간 임시 수도였다. 미국인이 자국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한 주조국이 처음 설립됐고, 증권거래소도 여기서 생겨났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이 발표하는 제조업지수는 미국 산업 동향을 보여주는 지표로 널리 쓰인다. 극성 스포츠팬이 많기로 유명한 필라델피아에는 야구(필리스)·농구(세븐티식서스)·아이스하키(플라이어스)·풋볼(이글스) 등 4대 프로 스포츠팀이 있다. 한 도시..
또 안타까운 부고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대표적 제빵회사의 공장에서 근로자가 작업 중에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빵 만드는 곳에서 일하다가 참변을 당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운용하지 않고 영리만을 추구하는 비인간적 기업경영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모범적 탈북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던 여성이 오래전에 고독사한 채 발견되었다. 아직 정확한 사인규명이 필요하지만 목숨을 걸었던 탈북이 이런 죽음을 예견하고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터이다. 만일 송파나 수원의 세 모녀 사례와 같이 생활고에 따른 죽음이라면 그동안 생사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동료시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논의들이 얼마나 허망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성공적..
식구들 모이는 날은 콩이나 보리를 넣어 잡곡밥을 주로 하지만 이맘때는 ‘쌀밥주간’이다. 햅쌀밥에 명란을 얹어 먹는 건 나의 호사, 햄구이 한 조각 얹는 것은 아이들의 호사지만 햅쌀의 차진 밥맛에 바치는 헌사로 잠시나마 세대 통일을 이룬다. 수확철을 맞아 자못 다복한 식사 풍경이 연출되었으나 우리 쌀의 처지는 몰릴 대로 몰렸다. 여느 해와 달리 ‘쌀’ 하나로 모든 정치인들과 대통령까지 한마디씩 보태는 중이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는 국민적 관심도 높은 편이 아닌 데다 농어촌에 정치적 기반을 둔 여야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곤 해서, 대체로 순둥순둥했다. 그런데 국정감사에서는 쌀값을 놓고 여야가 상임위원장의 의사봉을 낚아채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상정해서다. 초과..
자고나면 갓 핀 꽃송이가 감쪽같이 없어지더니 밤새 금잔화 꽃숭어리만 뚝 따먹고 가더니 이 눔이 좀 모자란 놈인가, 시 쓰는 놈 혹시 아닐랑가 서리태 콩잎보다 향기로운 꽃을 좋아하다니 이 눔 낯짝 좀 보자 해도 비 온 뒤 발자국만 남기더니 며칠 집 비운 새, 앞집 어르신이 덫 놓고 널빤지에 친절하게도 써놓은 ‘고랭이 조심’에도 아랑곳없이 밤마다 코밑까지 다녀가더니 주야 맞교대 서로 얼굴 볼 일 없더니 어느 아침 꽃 우북한 데서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꽃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나 놀란 이 꽃도둑 후다닥 논틀밭틀로 뛰어가는데 아 참, 도둑의 눈이 그렇게 맑다니 - 시 ‘꽃도둑의 눈’, 김해자, 시집 중에서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들깨를 베고 있는데, 윗밭 언니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올라오다, “그래 댁의 콩은 괜찮수?..
전쟁의 광기는 세계 경제를 요동치게 하고 문화까지 말살한다. 문화만이 이런 광기를 치유한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이다. 히틀러의 전쟁 광기에서 어떻게 벗어날까를 묻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에 프로이트는 격조 있는 문화 발전만이 파괴본능을 치유하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취지로 답장을 썼는데, 그 답은 여전히 유효하다. 얼마 전 푸틴의 영토 확장 야욕의 상징인 크름대교가 폭파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를 장담하던 러시아는 전쟁물자 보급통로 단절로 어려움을 겪었다. 눈에 보이는 다리보다 눈에 안 보이는 문화라는 다리 단절의 후유증은 두고두고 치명적이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과 6·25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된 데다 문화의 다리마저 사실상 절단되었다. 여기서 문화는 당연히 한자와 서(書)라는 언어와 예술이다. 그 ..
(43) 장충단비 1971년, 2021년 장충단공원 비석.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공원’으로 잘 알려진 장충단(奬忠壇)은 ‘충성을 장려하는 제단’이란 뜻이다. 고종 32년(1895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순국한 신하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광무 4년(1900년)에 고종 황제의 명으로 지어졌다. 장충단에는 본래 제단과 사전(祀殿), 부속건물 등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전부 소실되고 지금은 ‘장충단’이라고 새긴 비석만 남아 있다. 사진에 선명한 장충단이라는 글씨는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쓴 것이라 한다. 이 장충단을 장충단공원으로 만든 것은 일제다. 일제는 1919년 이곳을 공원으로 지정하여 벚꽃을 심고 연못, 놀이터 등을 만들었으며 비석도 뽑아버렸다. 일본의 메이지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