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게 아니라서, 문득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들고 창문을 바라보는 순간, 어떤 물체가 유리창에 부딪혀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방금 읽다만 소설 속의 일일까,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2층 사무실 베란다로 얼른 내려갔다. 어이쿠, 내 짐작이 맞았다. 화분들 사이에 미동도 않고 가만히 있는 건 한 마리의 작은 새였다. 주먹만 한 새는 추락하는 동안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한 듯했다. 다행히 그 와중에도 두 다리로 몸뚱이를 버티며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뇌진탕인가. 한쪽 발도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뭔가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불길한 징조가 하나 더 있었다. 바닥에 닿아 있는 새의 꼬리였다. 새..
벌써 16년 전 일이다. ‘그린보트’ 두 번째 출항에 여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탔다. 보름 동안 1000명 이상이 한배를 타고 진행하는 연수 과정이라 아이랑 너무 오래 떨어지는 게 힘들어 함께 배에 올랐다. 어찌저찌 일을 보다 첫날 갑자기 아이를 선내에서 잃어버렸다. 8층짜리 건물 크기 크루즈선이라 정신이 아득했다. 나 역시 처음 타보는 배라서 잔뜩 긴장하며 문마다 열고 다녔는데, 어느 문을 하나 열고는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시퍼런 파도가 난간에 들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은 매우 무겁지만 만약에 아이가 이걸 열고 나갔을 생각이 들자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지나가는 우리 직원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나 좀 살려줘”라고 말했다. 여섯 살짜리 아이를 이 배에서 잃어버렸는데, 어디서도 안 보..
이태원의 좁디좁은 골목에서 150명이 넘는 소중한 생명이 허망한 죽음을 맞은 다음날 아침. 국민의 안전을 총책임지고 있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말은 귀를 의심케 했다.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머리 숙여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희생자들과 유족, 국민들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책임 회피였다. 정부는 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정해 정쟁을 멈추자고 하면서 이번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기하는 지침을 내놓았다. 참사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기보다 자신들에게 미칠 후폭풍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정부는 참사를 막지 못한 제도적 한계도 주장하고 나섰..
언제부턴가 전북 익산시의 심벌마크에 눈길이 갔다. 익산의 대표 문화재인 미륵사지 석탑을 이미지화해 디자인한 것이다. 그런데 심벌마크 속 미륵사지 석탑은 온전하지 않다. 탑의 한쪽 옥개석들이 아래로 기울어 무너지는 듯한 모습이다. 그 옥개석의 기울어진 선(線)을 익산의 ‘益’자와 절묘하게 연결시켰다. 이 심벌마크에서 무너져 내리는 듯한 옥개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미륵사지 석탑을 어떻게 기억해왔을까. 흔히 이 탑을 두고 7세기 백제의 석탑, 현존하는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석탑으로 설명한다. 그렇다. 하지만 기억의 측면에서 보면, 더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탑의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그 위태로운 부분이 콘크리트로 덧씌워져 있는 모습..
(44) 덕수궁 돌담길 1971년, 2022년 덕수궁 돌담길.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연인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드라마 에서 우영우 변호사가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걷던 남자에게 묻는다. 덕수궁 돌담길은 ‘걷다’보다는 ‘거닐다’가 어울리는 한가로운 산책길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조선의 왕이 살았던 덕수궁의 돌담길은 고종에게는 한가로운 길이 아니었다. 덕수궁의 원래 명칭은 ‘경운궁’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살해된 후, 고종이 거처를 경복궁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덕수궁’으로 현판이 바뀌었다. 덕수궁 돌담은 러시아공사관의 담과 맞닿아 있었는데 여차하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위한 지름길이었다. 덕수궁 돌담부터 러시아공사관까지 거리는 120m밖에..
토트넘 홋스퍼의 손흥민이 지난 1일(현지시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조별리그 D조 올림피크 마르세유(프랑스)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 어깨에 얼굴을 부딪쳐 치료받고 있다. 한국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은 안면골절 수술을 받게 돼 2022 카타르 월드컵 출전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마르세유/AP연합뉴스 손흥민은 22세 때 월드컵에 처음 나갔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다. 그 대회에서 1골을 넣었다. 알제리를 상대한 조별리그 2차전 후반 5분에 자신의 월드컵 첫 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골 세리머니를 하지 못했다. 한국이 0-3으로 지고 있던 터라 기뻐할 새가 없었다. 그 경기가 결국 2-4 패배로 끝나자 손흥민은 홀로 땅을 치며 대성통곡했다. 그때부터 그에게..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갑자기 156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희생자 중 10~20대가 116명이다. 세월호 참사와 그것이 남겼던 과제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지난 8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던 다짐과 노력은 어디로 갔을까. 말로 다 못할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낀다. 삶을 누리지도 못한 너무 젊은 희생 앞에서 ‘명복을 빈다’고 말하지 못한다. 거대한 사태에는 복합적이고 다기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미래의 주인인 젊은이들이 살아갈 이 체제 자체에 대해 다시 진단하고 실천해야 한다. ‘국뽕’ ‘선진국’ 같은 허위의식 따위는 버리고 말이다. 이태원에는 온갖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오가고 또 그만한 문화적 축적이 있다. 이주민 중에서도 소수에 속하는 무..
이태원 참사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그날을 떠올린다. 그사이 이태원과 서울광장에는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가 설치되었는데,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사고’와 ‘사망자’는 책임을 미루고 지우는 단어다.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가리키는데, 이는 뜻밖에 일어났기에 손쓸 수 없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사망자 또한 “죽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통해 죽음을 단순화시킨다. 그러나 사고가 아닌 참사다. 사망자가 아닌 희생자다.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다. 애통하다. 참담하다. 참사 당시, 국가는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국가는 왜 책임을 다하지 않았는가. 희생자들의 분향소가 마련되기도 전, 대대적인 온라인 여론전이 이루어졌다. 핼러윈은 외국 전통이 상업적으로 변질돼 청춘의 방종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