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은 한국 근현대미술의 ‘사대천왕’이다. 1910년을 전후해 태어난 이들은 독자적인 조형 언어와 기법으로 한국의 미감을 형상화했다. 한국 현대미술은 이들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태호 미술평론가가 (세창)에서 화가의 삶과 작품을 분석해 박수근(1914~1965)과 이중섭(1916~1956), 이응노(1904~1989)와 김환기(1913~1974)를 각각 라이벌로 설정한 것은 흥미롭다.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박수근과 이중섭은 서민의 고단한 삶을 화폭에 담았다. 박수근이 화강석 같은 질감으로 이웃의 삶을 포착했다면(‘소녀’ ‘빨래터’), 이중섭은 격정적인 감성으로 가족과 시대상을 표현했다(‘황소’ ‘길 떠나는 가족’). 이응노와 김환기는 한국..
3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발표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이라는 짧은 글은 이 역사적 사건을 마치 예견한 것처럼 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지구적 차원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기에 역사는 드디어 그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에 대한 나의 비판은 이미 있었지만 지금 세계는 냉전시기보다 더 복잡해졌고 그 해법도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했던 그마저 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고 현재 너무나 다양하게 혼재하는 ‘정체성’과 이의 인정을 둘러싼 갈등을 그 요인으로 보고 있다. ‘미국제일주의’를 내세우고 등장한 트럼프의 미국 정체성이야말로 후쿠야마가 주장했던 역사의 종말을 분명하게 반증한 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세안과의 관계가 ‘신남방정책’으로 다시 호명됐다. 25~26일 개최되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는 향후 신남방정책을 가속화하는 동력이 될 전망이다. 1989년 한국과 아세안은 대화의 물꼬를 텄고, 독일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탈냉전’의 흐름과 함께 아세안과 한국의 관계에도 온기가 불어온 것이다. 그간 제한적으로 이뤄지던 아세안 국가와의 교류에도 점차 활기가 돌았다. 다수의 한국 기업이 아세안 국가로 이전해 생산의 세계화 흐름을 따랐고, 신흥공업국으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아세안의 유학생과 이주민들은 한국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국은 자본 수출과 생산설비 수출, 문화 수출국으로 아세안 앞에 서게 되었고, 아세안은 한류 소비자이자 유학생, 노동자, 결혼 이민자로 다가오게 되었다. 아세안은 우리 국민..
최근 중국산 생강 81t을 국내산으로 거짓 표시한 뒤 불법 유통시킨 업자가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본격적인 김장철을 맞아 값싼 수입산 배추김치와 고춧가루, 생강, 마늘 등 양념류가 국내산으로 둔갑하거나 수입신고를 거치지 않고 불법으로 판매되는 등 농산물 불법유통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올해 유례없는 잦은 태풍과 가을장마로 배추와 무의 생산량이 줄면서 수입산의 원산지 표시 위반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농산물품질관리원에 따르면 지난해 김장철 특별단속으로 원산지 표시를 위반하여 적발된 업소가 141개나 된다고 한다. 현행 ‘농수산물의 원산지 표시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원산지를 허위 표시, 위장 또는 혼합·판매하는 행위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형사 처분을 받게 되고, 원..
대선배와 작년에 우연한 계기로 친분이 생겼다. 부산에서 학생을 가르친다는 그 부인과 해운대에서 함께 모임을 가지면 어떻겠냐는 말을 나눈 적이 있다. 차일피일하던 차에 이달부터 아내가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근무하게 되어 주말에 부산에서 같이 만나기로 했다.고속열차를 예약하고 집을 나섰다. 열차에 오르자마자 점심 도시락을 비우고 나니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비몽사몽 중에 어렸을 적 완행열차를 타고 부산에 갔던 날들을 되새겼다. 열차가 느리기도 하고 내가 어려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은 너무 멀고 지루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황당하지만 열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 열차는 풍경을 살피기 어려울 만큼 빠르다. 승객들도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비롯한 온갖 전자기기에 접속한 채..
일요일 아침마다 조금 다른 기분으로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지만, 왠지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평소와는 달리 숙면을 취해서? 아니다. 전날 과음으로 숙취가 있어서? 아니다. 내게 일요일은 다름 아닌 글을 쓰는 날이기 때문이다. 기지개를 켜고 찬물을 들이켠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링 위에 오르는 복서처럼 비장하지도 않고, 면접장에 들어서는 구직자처럼 손에 땀을 쥐는 심정은 아니다. 인근의 카페로 이동하는 발걸음은 경쾌하기 그지없다. 적당한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상태가 된다.어릴 때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마시는 엄마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까맣고 뜨겁고 쓰기까지 한 음료를 왜 굳이 아침부터 마실까. 생각해보니 그것이 엄마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블랙커피를 한 모금 ..
한 가지가 좋게 보이면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다 좋아 보인다는 속담이 ‘아내가 귀여우면 처갓집 말뚝에 절을 한다’입니다. 비슷하게는 ‘아내가 귀여우면 처갓집 문설주를 쓰다듬는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울타리까지 예쁘다’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귀엽고 예쁜 것과 처갓집 말뚝과 문설주, 울타리는 무슨 관계가 있기에 사위가 좋아할까요? 단순히 아내가 살았던 집과 쓰던 기물이라서 그런 걸까요? 그리고 이 속담을 만든 건 사위였을까요, 처갓집 식구들이었을까요. 아마 둘 다 아닐 겁니다. 이 속담을 만든 사람은 처가 동네의 사람들이었을 겁니다.사랑하는 이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이 남편, 아내 사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아내에게 점수 따는 가장 큰 비결은 아내의 친정에 잘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계산 없..
휴일 저녁, 또 하나의 마침표가 찍혔다는 소식을 듣고 멍해졌다. 끝나서는 안될 문장이 갑자기 중단되듯이 예고 없이 찍혀버린 마침표. 그 마침표는 하나의 사실을 가리켰다. 자살. 이 두 글자는 비교적 명확하게 죽음의 원인을 설명한다. 살인 용의자도, 수사기관의 수사도, 재판부의 판결도 필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갑작스레 찍혀버린 마침표 앞에는 무수히 많은 문장들이 있음을. 한 사람의 삶이, 이를 꺾어버리고 상하게 한 폭력과 사회적 압박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문장을 이어가고자 했던 손을 억지로 잡아채 비틀어버린 힘들이 있었다는 것을. 마침표 이전에 쓰인 수많은 문장들을 기억한다. 적어도 최근 쓰인 문장들은, 고인의 손으로 쓰이지 않았다. 불법촬영·폭행·협박 등으로 이어진 문장들은 집행..